봄 냄새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산이 벽처럼 눈앞을 가로막고 선 한적한 국도 변의 샛길을 따라 1km를 더 들어간 곳에서 내비게이션은 도착을 알렸다. 차 앞으로 검문대가 가로로 길게 누워 있었다. 검문대 너머로 길은 두 갈래였고, 도로 위의 화살표는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에서 5초 정도 대기하자 갈림길 사이 정중앙의 잔디밭에 설치된 전자알림판이 말과 글로 안내해 주었다.
- 정영진님 환영합니다. 잠시 후 오른쪽 길로 진입하여 안내판을 따라 이동해주십시오.
이윽고 검문대가 올라가고 영진은 아스팔트 위의 화살표와 안내판의 지시를 따라 우회전해 들어갔다. 1차선 도로 양쪽으로는 사철나무가 빈틈없이 빽빽하게 심어진 채 벽을 이루고 있어서 도로의 정면 외에 차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0m 간격으로 설치된 안내판마다 영진을 환영하고 있었다. 세 번째 안내판을 지나자 기계식 주차장 입구를 닮은 건물 하나가 터널처럼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차량 한 대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났고 공간의 맞은편 벽에 ‘진입한 후 차량의 시동을 끄고 대기하세요’라는 메시지가 보였다.
시동을 끄자 등뒤에서 문이 닫히는 모습이 룸미러를 통해 보였다. 문이 닫히자 영진의 차를 품은 공간은 엘리베이터처럼 부드럽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센서에 의해 저절로 작동되는 듯했다. 1층, 2층, 3층… 영진은 자기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감안하여 깊이를 계산하고 있었다. 영진의 계산이 맞다면 엘리베이터는 7층 깊이의 지하에 내려온 셈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수직이동을 끝낸 엘리베이터는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움직임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번엔 좌측으로 길게 이동했다가 다시 전진하여 얼마쯤 더 이동한 다음 마침내 정지했다. 차량의 시동을 키라는 안내 메시지가 문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윽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거리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폐쇄공간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영진은 자기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우주공간처럼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낯선 세계가 똬리를 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차의 전조등은 어둠 너머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어둠은 벽처럼 버티고 서서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정면에 하얀색 원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영진은 도저히 차를 몰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상황과 크기로 미루어 동그라미는 주차구역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영진은 조심스럽게 원을 향해 나아갔다. 타이어에 와 닿는 바닥의 감촉에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차가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원은 넓었다. 운전석 창문 너머로 하얀색 선까지 넉넉한 공간의 여유가 느껴졌다. 순간 하얀색 원을 그렸던 바닥의 불빛도 사그라지기 시작해 이윽고 영진은 크기와 깊이를 상상할 수 없는 완벽한 어둠 한가운데 방치되었다. 마치 우주 공간에 홀로 버려진 조종사처럼 아득한 고독이 느껴졌다.
- 시동을 끄세요
정면의 어둠에서 빨간색 글귀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구원의 메시지라도 되는 양 친절하게 정확히 세 번 깜빡이고 나서 사라졌다. 사위는 다시 별을 닮은 희미한 불빛 하나도 없는 완벽한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둠은 석유 찌꺼기처럼 끈끈한 액체와도 같았다. 차창을 열면 금방이라도 익숙한 냄새를 동반한 석유가 콸콸거리며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았다.
영진의 차가 시동 걸릴 때의 중후한 저음을 닮은 기계음을 뿜으며 눈앞의 어둠은 세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빛은 어둠의 캔버스를 단숨에 자른 힘 그대로 차와 영진을 두 동강이 낼 듯 날카롭게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빛은 속도를 늦추면서 차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옆으로 비켜섰고, 어둠이 가로막고 서 있던 자리를 영화관 스크린처럼 좌우로 길게 벌려 놓았다. 빛에 눈이 익자 빛 안쪽에 자리잡고 있던 공간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들이 눈으로 파고들었다. 빛이 열어 놓은 공간의 끝에서 스크린의 크기와 동일한 통 유리창이 공간을 끝내고 있었다. 빛은 두려움을 순식간에 호기심으로 뒤바꿔 버리는 힘이 있었다. 영진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차의 뒤쪽은 어느새 매끄러운 금속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어둠의 벽이 물러나 그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말끔하게 닦인 고급스러운 유리 책상과 의자, 의자 뒤로 높은 벽면을 통째로 채운 책꽂이가 있었고, 족히 2천권은 넘어 보이는 말끔한 책들이 책꽂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공간은 넓었다. 흡사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닮아 보였다. 고급 소파와 냉장고, 오디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술과 음료가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걸어 영진은 창문 앞에 섰다. 자기가 7층 깊이의 지하에 내려와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르자 창 밖의 풍경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창 밖의 빛의 정체는 햇빛이었다. 땅이 있어야 할 곳에 하늘이 떠 있었다. 하늘은 지하와 지상의 경계로 내려와 자신의 무게로 구름을 짓눌렀다. 하늘을 어깨에 이고도 그러나 구름은 유유히 제 길을 가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이끌려 경계에 내려 앉는 순간 공空을 위장하고 있던 경계의 실체는 명확해졌다. 경계의 아래에서 경계의 위는 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는 나뭇잎의 떨림은 경계 아래에서는 다만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였다. 몸이 속해 있는 세계의 실체가 그제서야 선명하게 펼쳐졌다. 안이 들여다 뵈지 않는 수십 개의 동일한 크기의 창문이 동그란 하늘 밑에서 중앙을 향해 둥글게 마주하고 있었다. 한때는 경계였다가 깊이 꺼져 앉은 바닥은 단정히 깎인 잔디로 뒤덮여 있었고, 모든 창문에서 동일한 거리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자리에 예정된 추락을 끌어안은 물들을 끊임없이 쏘아 올리는 분수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