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자왈 거상불관 위례불경 임상불애 오하이관지재
-공자가 말했다. "위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않고, 예를 행할 때 삼가지 않으며, 상을 당하고도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이유로 그런 모습을 보겠는가?"
논어 세 번째 편인 <팔일>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관寬은 곧 관대寬大이지요. 관대함은 근본적으로 강자의 미덕입니다. 허물이나 죄가 있는 상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힘이 있어야 하지요. 학력이나 정신력 따위가 높을 때 실천할 수 있는 종류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여러 힘 가운데에서도 공자가 정치 권력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임은 자명합니다.
경敬은 공경입니다. 공손한 자세로 삼가는 것이지요. 대중 앞에서는 짐짓 예의 바른 척 하지만 마음의 경계가 풀어지는 사석에서 무례한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면 위선적인 자에 불과합니다. 속마음에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좁쌀만큼도 없는 오만한 자가 분명하지요.
상을 당해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공자가 단지 예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이 예를 들지는 않았겠지요. 공자가 꼬집은 것은 권력자들에게 결여된 공감의 정서일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힘을 함부로 쓴다면 늘 자신에게만 관대한 염치없는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작 자기 자신에게 온갖 더러운 범죄들의 정황이 뚜렷한 데도 불구하고 오직 밖으로만 칼끝을 겨누면서 정의의 수호자 운운하는 파렴치한 자들이 권력을 잡고 선한 리더 캐릭터로 코스프레하니 TV를 켤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은 공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외교도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호혜의 원칙은 상대가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유능한 리더일 때만 작동할 뿐입니다. 낡은 신념으로 중무장한 무식하고 비민주적인 자를 인간적으로 신뢰하여 진심으로 존중하며 상호 호혜의 정신에 입각하여 협상에 임할 상대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다른 리더로 바뀌기 전의 빈틈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이에나처럼 다가설 것이 뻔하지요.
국내외에서 실정을 거듭하여 낮은 지지율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면 국민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결여된 무늬만 리더인 자가 선택할 방법은 정해져 있습니다. 실력으로 당당하게 대결할 자신이 없으니 과거와 현재의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무리수를 남발하고 반발하는 국민들을 법으로 포장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이지요. 그런 뻔한 수의 결말은 역사적으로 단 하나에 귀결됩니다. 자멸,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국민은 리더의 자멸을 결코 방치하지 않습니다. 리더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