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자왈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공자가 말했다. "인이라는 마을에 살게 되면 아름답게 된다. 인에 살지 않기를 택한다면 어찌 지혜를 얻겠는가?"
논어 제 4편 <이인>의 첫 구절입니다. 공자가 은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속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를 사랑한 공자는 마치 시어처럼 함축적 의미를 품은 글자들을 사용하기를 즐겼습니다. 주역 공부와 해설을 통해 그가 주역만의 독특한 비유에 매우 익숙했다는 점도 충분히 참고해야 합니다.
'이里'는 명사로 '마을'의 뜻이지요. '십 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나 '만리타국'과 같은 표현처럼 거리를 재는 단위로 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명사적 뉘앙스를 가진 동사로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인里仁'은 '인이라는 마을에 살다'의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마음을 인한 상태로 늘 유지하면', '인한 상태의 마음을 한결같이 지속하면'의 시적 은유인 셈이지요. 마을이란 사람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의 터전입니다. 사람이 마을에 살듯이 늘 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자연히 아름답게 된다는 것이 '위미'입니다. 삶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택擇'은 '선택하다'는 뜻의 동사요, '불처인'은 그것의 목적어입니다. 불처인은 '인에 살지 않다', '인에 머무르지 않다'의 의미이니 '택불처인'은 인이라는 마을에 살지 않기를 택하는 것입니다. 곧 인하게 살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핵심을 인仁으로 보았지요. 인하지 않고는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으니 인과 거리가 먼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그 과정의 끝에서 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언득지'라고 공자가 말한 까닭입니다.
평생 인仁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사람이 역시 자신과 동류의 사람들을 잔뜩 끌어다 모아 놓고 하는 일들이 인의 성격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인하지 않은 리더에게 국민들을 위한 어진 정책들을 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호랑이 우리에 들어가 잡아먹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인하지 않은 국민은 지혜로울 수 없고 지혜롭지 않은 국민은 인한 리더를 갖기 어렵습니다.
짐짓 화려해 보이는 착각의 불꽃이 피어 올랐다가 꺼지면 지독한 어둠이 이 나라를 다시 덮칠 것입니다. 어질 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은 리더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모래 폭풍 속에서 길잡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것으로 믿는 것은 정신병이지요.
위 구절에 대한 기존의 해설들은 공자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이里를 마을로 해석하여 '인이 있는 마을에 사는 것이 아름다우니 인한 마을을 골라서 살지 않으면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풀고 있습니다. 주희朱熹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지요. 시적 감수성이 결여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와 같이 정리를 마치고 찾아보니 맹자가 이里를 '처하다'는 뜻의 동사로 보았고 다산 정약용이 맹자의 관점을 수용했다고 나옵니다. 당연히 이 관점이 옳다고 봅니다. 저의 해석은 이 계보를 잇는 것이 되며, 공자 만의 시적 은유와 그가 사랑한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주역식 비유의 뉘앙스를 살릴 때 보다 직관적인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