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자위소 진미의 우진선야 위무 진미의 미진선야
-공자가 소에 대해 평했다. "미의 극치뿐만 아니라 선의 극치에 도달했다." 무에 대해 논평했다. "미의 극치에 달했으나 선의 극치에 이르지는 못했다."
소韶는 요堯임금을 계승한 순舜임금 시대의 음악이고 무武는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의 하늘을 연 주 무왕武王 시대의 음악입니다.
음악만큼 시대 정서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예술도 없지요. 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문화, 정치 경제적 상황, 민중의 열망 등이 당대의 음악에 모두 스며들어 그 시대 만의 고유한 장르적 특성을 구축합니다. 성악곡 중심의 대중음악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에는 가사와 영상, 그리고 음악 소비자들의 참여가 그것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공자가 말한 미美는 음악의 형식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BTS의 케이-팝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언제나 당대 고유의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지요. 그 아름다움이 동시대인들의 마음과 공명할 때 음악은 비로소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공자는 소나 무가 형식미에 있어서는 가장 높은 수준을 획득했다고 인정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사후에 등장한 지구 상의 수많은 음악을 감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의 평가에 대해, 한 번도 그 시절의 음악을 듣지 못했던 우리가 논한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음악관을 통해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사유해 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제 우리는 공자가 생각하는 선善을 형식이라는 틀에 담긴 음악의 내용미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임금의 태평성대를 계승한 순임금 시대의 음악 소는 인간의 감정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선율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요. 반면에 무는 혁명의 시대답게 인간의 마음을 강렬하게 자극하여 격동시키는 힘찬 가락이 주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즉, 공자가 생각하는 음악의 진선이란 인간의 영혼을 평화롭게 만드는 데서 달성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태평성대에만 가능한 것이므로, 공자가 소와 무라는 음악의 대비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결국 어진(仁) 리더의 덕치가 구현되는 평화로운 세상의 소중함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다시 만난 세계'까지, 우리의 거리와 광장은 늘 민중의 노래로 채워져 왔습니다. 우리는 이미 20여 년 전에 자신의 정치색을 마음껏 드러내도 국가로부터 어떠한 불이익도 입지 않는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운 바 있습니다. 그 꽃은 매번 수구 세력에 의해서만 꺾이고 밟혔을 뿐이지요. 과거로의 회귀 만을 꿈꾸는 그들의 정치는 너무도 구리고 저열합니다. 세계는 촛불혁명을 통해 이미 한국의 민중이 참여하는 진보 정치가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확인했습니다. 세련된 한국의 정치가 토양으로 자리잡을 때 그 위에서 얼마나 매력적인 문화 콘텐츠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지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어떤 나라인지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이런 변화를 감각하지 못하는 수구의 구리고 저열한 정치는 그래서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들의 수준 낮은 모든 기획과 시도는 민중의 힘에 의해 처절하게 궤멸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