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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 Sep 17. 2021

지방에서 일자리 구하기

경단녀의 지방 공공기관 취업하기

연말을 맞아 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지란을 살폈다. 군청 홈페이지에는 주민들을 위한 지원사업뿐만 아니라 평생학습 수강 신청 과목이나 보건소에서 진행하는 예방접종 같은 다양한 생활 정보가 올라오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들렀다.

 

어디 새로운 소식이 없나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공지사항에 올라온 ‘청년 일자리 지원사업’을 발견했다.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어서 30대 후반인 내가 그 안에 포함이 되는지 아닌지 스스로도 좀 헷갈렸다.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군에서 지정하는 ‘청년’의 나이는 만 39세였다. ‘오호, 그렇다면 나도 해당되는군.’ 마흔이 몇 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보다는 중년에 가까운 나이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직까지 나를 ‘청년’으로 쳐준다는 사실에 은근한 기쁨을 느끼며 서류에 나온 사항을 꼼꼼히 살폈다.


그 무렵 나는 외벌이로 사는 빠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좀 여유롭게 지내고 싶었다. 뚜렷한 사회적 성취감 없이 '그저 아이의 엄마로만 지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길지 않나'라는 의문이 들며 우울함이 생겼다. 주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취업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 공부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는 것도 다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거였다.


 입으로는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 지금처럼 유유자적하게 지내면서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여유롭게 사는 게 좋아.”라고 태연한 척 말했지만, 사실 도시에서 커리어를 쌓아 승승장구하는 동창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배울 만큼 배워서 제대로 된 밥벌이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죄악감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자기 비하였다. 아내와 엄마의 자리를 지키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일자리 지원사업의 신청 날짜를 보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군청 홈페이지에서 보니까 공공기관에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 사업을 진행하네. 1년 계약이래. 문화 관련 단체도 있다는데 한번 지원해볼까?”

늦은 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자리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한번 지원해 봐. 돈도 벌고, 경력도 쌓고, 나쁘지 않은데?”

나는 남편의 대답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이후 시골로 이사와 몇 년째 아무런 경력도 가지지 못한 나에게 실질적인 업무 능력을 배우고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어디에 원서를 내고 싶어도 그동안 제대로 된 일 경험이 없으니 자기소개서 한 줄 쓰기도 민망했다. 요샌 경력자를 구하건 신입자를 구하건 ‘경력’은 스펙 사항에 있어서 필수항목이다. 그런데 그 스펙이라는 것도 경력을 쌓을 만한 취업 경험이 있어야 될 것 아닌가.


명시된 급여도 나쁘지 않았다. 전남권 일일 생활비를 기준으로 책정했다는데 한 달에 230만 원 수준이었다. 그 정도면 최저 시급보다도 한 참 위다. 시골에서 이 정도의 급여를 받는 일자리는 드물었다. 게다가 공공기관에서는 9to6를 정확하게 지키고 노동법에 어긋나는 일도 없겠지. 속물적인 생각이지만 엄마나 지인들한테 새로 취업한 곳이 공공기관이라고 하면 지방의 중소기업보다는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터넷 지도를 보니 기관이 위치한 곳도 집에서 가까워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거의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딱 하나만 빼면. 바로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이었다.


해가 바뀌면 아들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터였다. 남들은 유아기 때보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더 손이 많이 간다며 일부러 그 기간에 맞춰 육아휴직을 하거나 일을 그만둔다던데.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는 가장 힘든 이 시기에 엄마라는 사람이 새롭게 일을 시작해도 되는 것일까. 늦은 오후까지 수업하는 유치원과 다르게 초등학교 1학년은 오전 수업만 마치고 하교한다. 아침밥 먹고 머리 좀 감을라치면 아이가 돌아올 시간일 텐데, 이를 어쩐다. 일을 시작하면 아침 시간은 거의 전쟁이겠지. 아직 취업은 하지도 않았는데 미리부터 김칫국을 꿀꺽꿀꺽 들이키며 이런저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음날 저녁 노트북을 열고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력서에 적을만한 경력이라고는 고작 십여 년 전 직장에서 일한 경험이 전부였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경력란을 채웠다. 문제는 자기소개서였다. 오랜만에 자기소개를 쓰자니 도무지 뭘 써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개란 질문도 가정환경이나 전공을 물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창의성 위주라 어려웠다. 질문이 거의 문창과 입시 수준이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문장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경험’을 쓰라는 질문이었다. 진짜 어려웠던 경험이 궁금한 게 아니라 지원자가 곤란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자세를 파악하고자 제출한 질문이겠지만, 어떤 사건이 면접관의 시선을 끌까 고민스러웠다. 결국 오래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며 은근히 ‘신입 지원자지만 사실 경력자’라는 점을 어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의도가 빤히 보이지 않았나 싶어 심히 민망하다.

면접 당일 잔뜩 굳은 채로 면접장에 도착했다. 인근 도시의 실내체육관에서 열릴 만큼 수백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단 면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전부 파릇파릇한 이십 대뿐이다.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자신감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이십 대들 사이에서 나는 초조하게 면접 순서를 기다렸다. 가슴에 달려 있는 명찰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현타가 왔다. 지금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고 그냥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대학을 막 졸업하고 면접장을 돌아다녔을 때보다 더 떨리는 긴장감을 느꼈다.


드디어 수험번호가 불리고 면접장 안으로 들어갔다. 면접장에는 연륜 있어 보이는 면접관 세명이 나란히 앉아서 매의 눈으로 지원자들을 살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면접관들이 질문을 시작하자 묘하게 긴장감이 풀렸다. 요즘 공공기관은 '블라인드' 면접이라 나이나 출신 지역, 출신 학교명 같은 건 묻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보고 대충 나이를 파악한 후 ‘결혼은 했냐?’ ‘일을 하게 되면 아이케어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같은 질문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블라인드’라는 명목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 것이 팩트였기 때문에 가능한 편하게 대답했다. 되든 안되든 제 발로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해볼만큼 해보자, 반포기의 자세가 오히려 긴장감 없이 면접에 임하게 했다. 짧은 질문들과 대답이 오가고 지정된 면접 시간이 지나갔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후련했다. 어쨌든 도전을 시도했다는 흥분감과 드디어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합격의 여부는 차후의 문제였다. 뭔가를 시도하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무척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에서 묘한 생기가 돌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삼십 대였다. 마흔이 되기 전에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아 단단한 바탕을 마련하고 중년 이후의 삶을 대비해 앞으로 나아갈 대로를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성공의 길목에서 일찌감치 벗어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다시 구직을 시작하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삼십 대는 아직 시작을 포기할 나이가 아니었다. 기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50대, 60대에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다. 해묵은 말이지만 늦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늦은 거고, 이제 시작이라고 여기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일주일 뒤 구직했던 사이트에 들어가 합격자를 조회했다. 면접관 중 한 명이 대놓고 ‘결혼 여부’와 ‘아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일말의 기대감도 없었다. 그저 남편에게 뭐라고 말해야 그나마 덜 쪽팔릴까 고민하며, 합격자 명단 파일을 열었다. 어라, 뭔가 잘못됐나? 이럴 수가. 합격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로 산지 칠 년 만에 시골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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