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보연이는 눈이 크고 또래에 비해 키도 큰 여자아이였다. 어린이집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오랜 세월 아들과 함께 유아기를 보냈다. 예쁘장한 외모에 낯을 가리지 않은 쾌활한 성격 덕에 누구에게나 예쁨을 받는 사랑스러운 아이다. 보연이는 항상 교실 문 앞까지 나가 먼저 하원 하는 친구들을 배웅했다. 아들이 현관문 앞에 앉아 끈이 풀린 운동화를 신을 때면 누나미를 풍기면서(사실은 동갑이지만 보연이가 발달이 빨랐다) 작은 손으로 운동화 끈을 매어줬다. ‘도대체 어느 집 애길래 아이를 저렇게 반듯하게 키웠을까?’ 나는 다정한 성품을 가진 보연이의 부모가 궁금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부모 중 한 사람이 집으로 초대를 했다. 학부모가 여럿 모인 사적인 자리는 처음이라 약간 긴장됐다. 초인종 벨을 누르고 초대한 집으로 들어가 보니 여러 명의 어머니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들은 금방 어린이집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았지만 나는 쉽게 엄마들 무리에 녹아들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엄마들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는데 모임에서 멀리 떨어져 어색한 표정으로 서너 살짜리 아이만 졸졸 따라다니는 다른 엄마가 보였다. 보연이네 엄마였다. 아기가 천진난만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보연이 엄마는 혹시 실례를 저지를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아이 뒤에 바짝 붙었다. (보연이 동생을 혼자 둘 수 없어 함께 데리고 온 것처럼 보였다)
한눈에 봐도 이국적인 얼굴이었다. 캄보디아에서 온 보연이 엄마는 귀화한 후 한국 이름을 사용했지만 우리는 그냥 그녀를 ‘보연이 엄마’라고 불렀다. (하긴 나도 학부모들 모임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누구누구 엄마’로 불린다) 나는 그녀가 보연이의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는데 우선은 보연이가 다문화가정이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나는 왜 또래보다 발달이 빠르고 야무지고 성격도 밝은 보연이가 다문화가정이라는 것에 놀랐던 것일까. (이 글을 쓰면서 나의 무지했던 과거 태도가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아주 조심스럽다)
영암에서 살며 결혼으로 이주한 동남아 여성을 종종 마주쳤지만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그동안 스스로가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생각 자체가 나와 ‘다름’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국 시골로 시집온 동남아 여성은 나이가 어리고 (혹은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거나) 배움이 짧고 경제적인 어려움 같은 이유로 결혼을 선택한 여성들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 인식 자체가 이미 차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학부모에게 전해 듣기로 보연이 엄마는 현지에서 대학을 나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무슨 사연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에 자식을 예의 바른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엄마였다. 다만 그녀는 한국어가 조금 서툴렀고, 내향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가족 외의 사람과는 쉽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일과 함께 남편의 사업을 돕기 때문에 늘 바쁘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엄마들 모임에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얼마 후 우연히 그녀를 다시 보게 된 장소는 어린이집 졸업을 앞둔 재롱잔치였다.
연말 무렵, 어린이집에서 재롱잔치를 연다는 초대장을 보내왔다. 어린이집에서 보게 되는 마지막 재롱잔치였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어린이집 강당으로 향했다. 아들아이는 무대 위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아이들은 무대 앞 선생님의 율동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복잡한 정렬을 바꿔가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는 손을 흔들며 아들에게 인사했다. 아들애는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나와 남편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조금 감동했던 것도 같다. 그때 어디선가 큰 소리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뒷자리에 앉은 보연이네 가족이었다. 보연이네 아빠는 자리에 일어서서 보연이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예쁘다! 잘한다!”라고 요란스럽게 응원을 했다. 다른 가족들은 그 장면을 보며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조용하던 보연이 엄마도 큰소리로 “보연아!”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웃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일어서서 열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보연이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손에 든 반짝이 도구를 흔들면서 엄마와 아빠에게 화답했다. 아마도 재롱잔치에서 본 가족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문득 보연이가 그늘 없이 바르게 자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린이집에서 재롱잔치를 했던 아이들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읍내에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어서 아이들은 모두 같은 학교로 진학했다. 아주 오랜만에 학교 운동장에서 보연이를 다시 만났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보연이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보연이는 풀 죽은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내가 이것저것 물어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운동화 끝을 땅에 비볐다. 평소에 보던 밝고 쾌활했던 보연이가 아니었다.
“왜 그러니? 기분이 안 좋아?”
보연이는 한참 후 속상한 이유를 털어놨다. 발레 교실 때문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읍내 청소년회관에서 영유아를 대상으로 무료 어린이 발레교실을 열었다. 시골에서는 유일한 무용 교습이라 항상 빠르게 수업이 마감됐다. 어린 여자아이의 학부모들이 이른 아침부터 대기를 하고 간신히 수강 신청을 할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보연이 또래 여자애들은 모두 그곳에서 발레를 배웠다. 친구들은 예쁜 발레 슈즈와 발레복을 사서 보연이에게 자랑했다. 한창 예쁜 것을 좋아할 나이인 보연이는 발레 교실에 다니는 친구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나중엔 부러운 마음을 넘어 속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부턴 엄마에게 미리 서둘러서 신청해달라고 부탁드려봐.”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보연이에게 말했다. 보연이는 내 말에 울상이 된 얼굴로 날카롭게 내뱉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여러 가지 마음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심상한 얼굴이었다. 사랑하지만 밉기도 하고 안쓰럽지만 억울한, 당당하면서도 쪼그라들고, 원망하면서도 감사하는, 혼자 힘으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 복합적인 마음들. 이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순간 이런 갖가지 감정들을 맞닥뜨릴까.
나는 보연이의 어깨를 토닥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연이 엄마에게 따로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이미 오랜 세월 한국에서 생활한 보연이 엄마가 정말로 수강 신청을 할 줄 모를 리는 없었다. 다른 집의 내밀한 사정도 알지 못하고 섣부르게 참견할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아이의 표정과, 목소리, 체념은 내가 익숙히 아는 냄새였다. 가족에 대해서 순수하게 기쁨과 행복만 기억하는 행운아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보연이가 말하는 ‘그런 거’가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른 나이에 감당 못할 이중의 감정을 알아버린 아이는 일찍 철이 든다.
지방에 있는 읍면 단위의 학교에 다니다 보면 보연이와 같은 다문화가정을 자주 만나게 된다. 단순 숫자로 본다면 서울이나 경기권이 가장 많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지방의 읍면 단위로 갈수록 다문화가정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아진다. 나는 문득 ‘다문화가정’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차별적 단어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들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는 윌리엄이나 벤, 나은이 같은 백인 부모의 아이들을 보고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외국인 부모를 가진 특별한 아이들이다. 시골에서 생각하는 다문화가정의 대부분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여기는 중국이나 동남아 출신이다. 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흔하게 차별적인 언사를 내뱉는지 지켜봤다.
실제로 동네 사람들은 동남아 출신의 여성에게는 존대를 하지 않았다. 식당에서도 버스에서도 그들은 초면에 반말을 들어야 했다. 으레 그들이 나이가 어리고 한국어에 아주 서툴 거라고 짐작하거나 (나이가 어리고 한국어가 서툴면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는 걸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을 거라고 속단한다. (가난하면 무시당해도 괜찮은 걸까?)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건데 마치 돈 때문에 한국으로 팔려 온 취급을 한다. (설사 금전적인 이유로 한국행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비난받을 잘못은 아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 때문에 의료보험이 샌다며 불평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다문화가정의 아이를 보면서 어쭙잖게 동정의 눈빛을 보낸다. 그게 기만적인 우월감과 뭐가 다를까. 나는 잠시 나 자신을 뒤돌아본다. 분명, 실수하거나 잘못 생각한 부분이 많다. 그들과 가까이서 함께 사는 나도 이런데, 외부에서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남들과 조금 다른 환경 때문에 일찍 철이 든 보연이지만 오래 마음이 무겁지는 않다. 삼 년 전 재롱잔치에서 보았던 장면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보연이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마땅한 보호를 받으며 바르게 성장하고 있다. 부모에게서 무한한 지지와 믿음을 경험한 아이는 자신을 소중히 대할 줄 안다. 나는 그날 강당에 모였던 사람 중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열렬하게 아이를 응원하던 보연이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 환한 얼굴을 보고 자란 아이가 잘못될 리는 없다.
다만 보연이가 살면서 느낄 이중의 감정들로 상처 받지 않길. 거창하게 ‘사회’ 문제나 ‘국가’ 차원의 행정적 지원을 운운하며 또 다른 차별을 만들지 말고, 그저 내 아이의 친구이자 이웃으로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길. (물론 늘어나는 다문화가정의 교육 행정적 지원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부디 아이가 내부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시선과 메우지 못한 간격 때문에 스스로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