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살이를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주로 도서관이나 복지관 같은 교육을 목적으로 모인 비슷한 연령대의 주민들이나 이제 막 학령기에 들어선 아이의 학부모들이었다. 아마도 직장을 제외한다면, 젊은 여성이 가장 활발하게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곳은 이런 모임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고 몇 번 만남을 이어가다 보면 다소 불편하게 여겨질 질문들을 듣게 된다. 어디에서 사는지, 나이가 몇인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있다면 몇 살인지, 직장맘인지 전업맘인지,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을 하는지, 남편의 직업은 무엇인지 같은 굉장히 사적인 질문들이 놀랍도록 대수롭지 않게 오고 갔다. 비슷한 처지에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오히려 상대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을 던지니 이쪽에서도 거리낌 없이 대답이 술술 나온다. 낯선 타인으로부터 이렇게 자세히 호구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나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신상명세가 빠르게 파악되니 가까워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사로운 수다가 시작된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거나 비슷한 연령대에 접어든 젊은 사람들이라 역시 먹고사는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근데 다들, 여기서 뭐 해 먹고살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시골로 이사한 후로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전에 신문사나 출판사에 몸담았지만,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경력도 짧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경력이라 생각했다. 시골에 터를 잡자마자 정신없이 임신과 출산, 육아의 격랑이 휘몰아쳤고 그 시간을 탈 없이 잘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른 일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만큼 성장하고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나자 슬슬 시골에서의 경제활동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서 무슨 직업을 갖고 살까?'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무렵 나의 머릿속엔 이런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시골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의 직업을 살펴보았다. (물론 어떠한 전문적 자료도 없이 지극히 주관적인 분류이다)
첫 번째로 내가 가장 많이 접한 직업은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들이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각 지역마다 군청이나 마을의 면사무소는 존재한다. 점심시간에 읍내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태반이 공무원이다. 시골은 군청이나 관공서 주위에 식당이 즐비하고 상권도 발달했다. 점심에 식당에서 보는 젊은 사람들은 다 무슨 일을 할까 생각했는데 대부분 공무직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우체국과 농협도 빠질 수 없다. 농어촌공사도 마찬가지다. 각 지역의 관공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탄탄한 일자리이다. 꼭 공문원이 아니라도 문화재단 같은 지자체의 산하기관을 포함해서 군청 소속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많았다.(이들은 공무원은 아니지만 공무원과 같은 처우를 받았다) 이직 전 군에서 지원하는 업체의 한옥 강사로 일했던 남편은 이직 이후 이와 비슷한 공공 산하기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근무 환경이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물론 군청에서 일하면서도 광주광역시나 목포 같은 인근 대도시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도 흔했지만 대다수의 인원이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 머무르며 직장에 다녔다. 요새 같은 세상에서는 공무원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지만(공기업이나 공공기관도 마찬가지), 지방 공무원은 대체로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경쟁을 한다. 때문에 서울이나 수도권보다는 그나마 도전해 볼만한 경쟁률인 모양이다.(그렇다고 어렵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간혹 낮에는 육아를 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일 년 만에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리기도 했다.
두 번째로는 많이 만난 직업군은 역시 농축업 분야이다. 농촌 하면 떠 오르는 모든 농작물, 즉 전통적인 농업분야(벼농사)와 감농사나 배 농사, 무화과, 포도, 멜론 같은 과일 재배를 하는 경우도 많았고 토마토, 고구마, 양파, 마늘, 갖가지 야채 작물을 수확해 농협의 로컬마트와 연계해서 판매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농산물이 아닌 꽃이나 식물을 키우는 화훼농가도 있었는데 젊은 농가들은 단순히 농업뿐만이 아니라 체험 사업도 같이 병행하며 다양한 방면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친환경 농업법을 이용한 축제, 오리 몰기 체험, 메뚜기 잡기 체험, 라벤더 꽃밭 체험, 식물 오일을 이용한 수공예품 체험하기 등 기발한 사업 아이템을 활용했다. 이들의 행보를 보다 보면 농업도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고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사업을 이어 축산업에 뛰어든 영농후계자들도 있다. 이들은 이미 부모로부터 노하우나 판로를 확보했기 때문에 귀촌을 하고 맨땅에 헤딩부터 시작하는 귀농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마치 <리틀 포레스트>의 재하처럼, 대도시에서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풍파에 시달리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의 축산업을 이어받았는데 알고 보니 소 기르는 일이 바로 자기의 적성이었다던 젊은 영농후계자도 보았다. (가끔 영화 속 재하도 부모의 땅이나 시설, 설비, 농작 노하우, 이미 개척한 판로 같은 게 없었다면 그렇게 쉽게 직장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흔하게 본 직업군이 자영업이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우리나라만큼 자영업자가 많은 나라도 드물다. 시골에서 본 자영업자들만 해도 음식점이나 카페 같은 요식업부터, 소매상, 의류업, 개인 마트, 학원, 공방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도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골의 경우 도시보다 땅값이나 월세가 월등하게 저렴하기 때문에 가게를 시작하기까지 진입장벽 역시 낮은 편이다.
또한 젊은 청년들의 경우 지자체에서 창업을 격려하기도 한다.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과 지역의 인구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서 이러한 지원사업이 지방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만 39세 미만의 청년들은 지자체에서 후원하는 창업 사업에 선정될 경우, 지원금으로 1~2년 동안의 월세와 인테리어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기획 아이디어만 좋다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창업을 시작하고 사업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의 장이 되기도 한다. 군청 지원을 받은 젊은 창업자들 중에 아이디어나 기획이 중요한 (또는 긴 준비 없이 쉽게 창업이 가능한) 공방 창업이 가장 많이 보였던 이유가 아닐까. (그러나 생각처럼 수익이 많이 나지 않거나 계약 기간만 채우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업체도 많아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군청의 후원이 아니라 개인의 자금으로 시작하는 자영업 역시 읍내 안에 점포 수 자체가 적어 비슷한 분야의 경쟁업체가 적다. 게다가 시골은 이왕이면 아는 사람의 집에 가서 물건을 팔아주자는 마인드이다. 소위 ‘개업 빨’이 잘 먹히는 장소이긴 하지만 꾸준히 매출이 유지되는 가게는 역시 질 좋은 (혹은 맛 좋은) 제품을 파는 가게이다. 슬프게도 자영업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시장 경기나 코로나처럼 재난에 가까운 외부요인으로도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작은 시골 읍내에서 익숙한 길거리를 걷다 보면 매번 새로운 가게들이 오픈하고 문을 닫는다. 읍내에서 못 보던 간판이 보이면 반갑지만, 항상 보이던 가게가 문을 닫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도시보다 진입장벽이 낮아도 도무지 시골에서 가게를 낼 배짱이 생기지 않았다. (사실 배짱뿐만 아니라 사업 아이디어도 없고 자본금도 없었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이 시골에서 직업을 갖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나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경력도 미천한데. 이 나이에 취업을 할 수는 있을까. 사회적인 자아성취감 없이 매일 무기력하게 사는 일에 신물이 났던 나는 한동안 이런 질문들을 끌어안고 우울한 마음으로 지냈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여기서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보자. 그렇게 나는 뒤늦게 진로고민에 빠졌고 취업의 불모지처럼 보이는 시골에서 우연한 기회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