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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 Sep 30. 2021

어쩌다 보니 동네 친구

낮은 덥고 밤은 쌀쌀하다.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환절기라 도무지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얼마 입지도 못할 가을 옷이 사고 싶다. 옷이라니, 지난번 플리마켓에 팔아치운 옷이 얼마나 많은데. 또 예쁜 쓰레기를 사 모으려고? 비염을 안고 사는 나는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코를 훌쩍였다. 다 부질없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계절성 알레르기 약을 삼킨다. 


얼마간 괜찮지 않은 날들이 지속되었고 한바탕 집안 정리를 시작했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물건 정리만 한 것이 없었다. 기름으로 얼룩진 누런 가스레인지 후드를 닦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물건을 주워 담으며 오랜만에 걸레질도 마쳤다. 작은 방에 쌓아둔 오래된 물건들을 꺼내어 박스에 담았다. 서랍을 뒤져 액세서리와 가방, 입지 않는 옷들을 박스에 가득 담겼다. 모두 ‘플리마켓’에 내보낼 물건이었다. 


몇 해 전 어쩌다 보니 영암으로 이사를 와서 친해진 세 사람이 모여 “어쩌다 보니” 모임을 결성했다. 청주에서 온 지연 언니와 서울에서 온 옥정 언니 그리고 나. 모두 한동네에서 살았고 같은 복지관을 다니며 친해졌다. 모여서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냥 ‘어쩌다’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는 편안한 동네 친구 사이였다. 


‘동네 친구’는 시골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재미다. 종종 모여서 맛있는 점심을 해 먹고, 날이 좋으면 가까운 교외 (강진이나 나주 같은 장소)로 함께 드라이브를 나간다. 늦은 밤 말 상대가 필요하면 불쑥 전화해서 한 시간씩 수다도 떤다. 가끔 가족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이 생기면 동네에 하나뿐인 호프집으로 가서 술잔을 기울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깊은 속내를 알게 된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동네 친구’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다정한 타인으로 존재하면서 지나친 간섭은 자제하고 그저 묵묵히 지켜보며 서로를 응원한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을 제외하고 사회에 나와서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을 만든 지 오래된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주변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지도 못했고 진솔한 속마음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학교나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그저 겉으론 좋은 관계인 양 웃으면서 지냈지만 서로를 향한 은근한 견제와 비교를 느낄 때면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머리가 커서 사람을 사귀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모두 여유가 없어서 일 것이다. 각자 살기도 바쁜데 어릴 때처럼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상대를 알아가고 상황마다 세심하게 배려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시골로 들어와서 또래의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 반가웠다. 일단 비슷한 나이의 친구를 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동년배를 만나면 금방 공감대가 생겼고 빠르게 가까워졌다.


영암에서 만난 동네 친구에게는 이상하리만치 거리낄 것 없이 속내를 내비친다. 순박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믿고 있어서 그렇다. 어릴 때처럼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런 솔직한 감정들이 창피할 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별나게 특별할 것도 없었다. 살림살이 역시 격차가 심한 도시 친구들과는 다르게 모두 비슷비슷하다. 시골이라 집값 오르내리는 것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하는 일도 거기서 거기라 서로 사정이 빤하다. 뉴스에서 나오는 도시의 부동산 폭등이나 주식 이야기는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그저 내 가족이 건강하고 매일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도태되고 있나?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일들도 많고 열정은 가득한데 매일이 새로울 것 없는 희미한 날들이라 쉽게 무기력해졌다. 그러면서도 혹시 내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도시 친구들에 비해 너무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닌가 시시때때로 막막해졌다. 나는 그렇게 이유 없는 불안과 초조가 덮쳐올 때면 사부작사부작 몸을 움직여 집안을 정리했다. 정리의 시작은 무거웠으나 곧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 가벼워진다. 

오랜만에 ‘동네 친구’들과 모여 단골 카페로 향했다. 그 무렵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편안하게 살 줄 알았다. 자아 찾기나 진로 고민은 당연히 20대에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서른이 넘고 마흔이 다 되도록 내 ‘자아’는 어디에 있는지 당최 모르겠고, 앞날은 더욱 막막해졌다. 


치열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로 들어오면 상황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나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망막에 불투명한 유리를 덮은 것처럼 답답했고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졌다. 작가가 되어 글을 쓰겠다는 다짐이나 일생을 문학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소망. 내가 꿈꾸는 모든 것들이 전부 어린아이의 망상처럼 느껴졌다. 


배우자에게 너무 많은 희생과 부담을 주고 있다는 죄책감, 경제적인 걱정들이 뒤섞여 자주 우울의 늪에 빠져들었다. 어느 때는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가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하고 초라하고 하찮게 느껴졌다. 늦은 밤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다가 문득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하는 현실 자각에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동네 친구들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밖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도, 집안에서 살림을 하는 친구도, 크고 작은 고민들을 안고 살았다. 


지연 언니는 관광호텔 프런트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활동적이고 쾌활한 성격이라 손님 응대를 제법 잘했고, 늘 자기만의 옷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예쁜 것들을 좋아하고 옷을 세련되게 코디할 줄 아는 감각의 소유자라 가망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의 사람처럼 좋은 환경에서 잘 살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도 갖고 근사한 집으로 이사도 하고 싶어 했다. 욕심과 다른 범상한 현실에 자주 좌절했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서 꿋꿋하게 하루를 살아냈다. 


십 년 전 서울에서 내려온 옥정 언니는 마음의 파동 없이 늘 잔잔하다. 세 아이를 기르며 날마다 가족을 위해 음식을 하고 꼼꼼하게 집안을 보살핀다. 손재주가 좋아 그림을 그리거나 공예를 즐기는데 직업으로 삼을 만큼의 열정은 없다고 무심하게 말한다. 편안해 보이는 언니의 일상에도 자잘한 균열은 존재한다. 시댁과의 마찰이나 남편과의 사소한 다툼들. 커가는 세 아이에 대한 걱정과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간다는 서글픈 마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 혼자만 한심한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구나.' 얄팍한 위안과 함께 동질감을 느낀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은 어쩌면 사는 동안 영원히 동반되는 숙제인지도 모른다. 마치 끊임없이 다음 스테이지가 연속되는 기분이다. 어렵게 이번 판은 어찌어찌 깬 것 같은데 다음 판에서 더 큰 대미지가 기다리고 있다. 공격을 해야 하나 우회를 해야 하나 매 순간 헷갈리지만, 어쨌든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인생은 지속된다.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여름이 끝나갈 즘 산길을 산책하다 보면 붉은 꽃무릇이 무더기로 보인다. 선명한 붉은색 꽃이 산책길을 뒤덮으면 마치 청춘의 끝자락을 보는 것 같아서 어딘가 처연하다. 선홍색의 화려한 꽃무릇이 맥없이 고개를 꺾으면 곧 차가운 바람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이렇게 지고 마는 것일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면서 힘겹게 걷다 보면 다정한 사람들이 내 곁으로 다가온다. 어쩌다 보니 동네 친구가 된 그들은 어깨를 툭 치며 가볍게 위로한다. '힘내. 할 수 있어.'라는 말 대신, '어우야 망하면 뭐 어때, '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꽃이 지고 잎이 스러져도 괜찮다고. 아직 계절이 끝난 것은 아니라고, 지나간 계절은 또 돌아온다고, 그러니 쉽게 지치지 말라고. 다정한 위로를 담백하게 표현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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