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 Aug 12. 2021

소비 요정이여, 안녕

미니멀라이프와 맥시멀라이프 사이에서

  이사를 하면서 많은 물건을 버렸다. 창고가 딸린 전원주택에서 20평대 아파트로 옮기려면 집에 있던 물건의 절반 이상을 없애야 했다. 작은 방에 있던 여분의 침대와 책상 물론이고 정원에서 쓰던 물건과 겨울철 난방용품까지 전부 버렸다. 오래된 옷가지와 그릇, 철 지난 아기 용품 역시 처분했다. 물건을 버릴 수 있는 데까지 다 버렸는데도 여전히 20평대 아파트를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짐이 한가득이었다. 


  이삿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짐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동안 버린 물건만으로도 이미 한 가족의 살림이 가능한 양이다. 집 안에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곱게 모셔두며 살았다니. 얼마나 꼭꼭 숨겨 놓았는지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구석구석에서 찾아내 그대로 새집으로 옮겨줬다. 그렇다 보니 이사를 마치고 나서도 새로 버릴 것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왜 나는 이렇게 많은 물건들에 둘러 쌓여 살게 된 것일까?


   시골에서 살면 생활이 단출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대형마트가 멀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쇼핑을 즐기게 됐고, 도시에서 살 때와 소비패턴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택배가 왔다. 넓은 주택에서는 자잘한 물건이 쌓여도 티가 나지 않았다. 아이 물건부터 생필품까지 필요한 제품이  생기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주문했다. 20평대 아파트로 좁혀 들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런 심각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물건들. 방치된 물건의 모습은 내 마음의 풍경과 같았다.


  한때는 나의 소비 습관이 절약이라고 믿었다.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단돈 천 원이라도 싼 가격의 물건을 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이리저리 사이트를 뒤져가면서 열심히 물건을 골랐다. 최저가의 물건을 사면 알뜰한 쇼핑을 했다며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몇 천 원을 싸게 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렸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버려진 무수한 시간들과 에너지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이사 후, 이제 더 이상 쓸 때 없는 물건을 늘리지 말자 다짐했다. 1년이 넘도록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나 오랫동안 입지 않은 옷들은 미련 없이 버렸다.  오랜 기간 새 옷을 사지 않았고 최신 스타일에 무관심해졌다. 그저 집에 있는 옷을 활용해 입성이 깔끔해 보일 정도로만 갖춰 입고 의류를 깨끗이 관리하는 세탁법을  찾아보았다.


  결혼 전에는 종종 브랜드 헤어숍을 들락거렸다. 머리의 기장에 펌이나 매직 스트레이트를 추가하면 못해도 이십만 원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 그런 곳을 방문해 달라진 머리를 거울에 비춰보면 어쩐지 스스로 근사하게 변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시골로 들어온 이후에는 미용비가 제로에 가까웠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니 나 자신을 치장하는 비용이 부담스러워졌다. 시골에선 커트비 만원이면 두 계절은 너끈하게 버텼다. 새치가 올라오기 시작한 머리는 직접 염색약을 사서 셀프 염색으로 해결했다. 이제 미용이나 패션에 거의 돈을 쓰지 않는다는 점을 자각하고 씁쓸해지기도 했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지금은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최대한 좋은 품질로 선택해 빠르게 구매한다. 더 이상 최저가를 찾아 시간을 낭비하며 곳저곳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몇 년 사이에 우리 집 소득이 급격하게 높아져 여유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변한 것뿐이다. 나는 더 이상 돈보다 시간이 훨씬 값싸게 먹히던 빈곤한 생활방식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지난 과거의 모습이 철없고 못났었다는 자기반성이 아니다. 작은 푼돈이라도 아끼고 싶었던 그 시절에는 최저가를 찾아 헤매는 광클 검색이 나에게 있어선 최선의 소비였다.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 액정 불빛을 바라보며 저렴하고 좋은 물건을 찾는 짜릿한 즐거움이 힘든 육아 중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다만 지금은 그때보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딸리고 (그래서 밤새 물건을 검색할 기력이 없다)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가치관이 변했다.  뒤돌아보니 물건 검색할 시간에 애랑 조금이라도 더 놀아주거나, 잠을 푹 자는 쪽이 훨씬 이득이었을 거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내가 시골에서 만난 외지인들, 즉 타지에서 유입된 정착인들을 보면 어쩐지 모두 소비습관비슷하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아파트에서 만나 친해진 지연 언니는 4년 전쯤 도시에서 이사를 왔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매일 새로운 스타일의 패션에 액세서리와 구두를 바꿔가며 정성스럽게 치장해 ‘타지 사람이 분명하구나’ 싶은 도회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읍내의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인터넷 쇼핑으로 많은 옷을 사고 몸단장에 집착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매끈매끈한 피부관리를 위해서 인근의 대도시에서 매달 수십만 원의 피부관리 티켓을 끊어 주기적으로 관리실을 방문했다. 그녀의 자기 관리는 도시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는데 (사실 나는 서울에서도 이렇게 자기 관리에 많은 비용을 들이는 사람을 보진 못했다) 신기하게도 일 이년이 지나자 모든 소비에 시들해졌다.

  동갑내기였던 송아씨도 마찬가지다. 시골 고등학교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낯선 타지로 이사 온 그녀는 옷은 물론이고 신상 가전제품과 아이 용품 같은 갖가지 물건을 사들이며 외로움을 달랬다. 이사 오기 전 대도시의 중학교에서 꽤 오랫동안 비정규직 교사를 했다고 들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자아와 임용에 대한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었다.


  우리는 각자 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물건을 사들였지만 이내 그것이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일상을 병들게 하는 치명적 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패셔니스트였던 지연 언니는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마음을 돌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정토회나 행복학교 등의 불교 관련 모임을  찾아다니며 명상과 기도에 몰입했고 스스로를 진정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송아씨는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후부터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진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쇼핑이 아니라 당당히 임용에 합격해 ‘선생님’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목표를 향해 무섭게 달렸다. 그녀는 임용시험 준비를 시작한 후로 물건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감정적으로 소비를 했다. 우울이나 슬픔, 좌절, 혹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보상을 무분별한 소비를 통해 얻었다. (고 착각했다) 자기 안의 결정적 문제를 외면하며 대책 없이 지른 물건으로 얻은 만족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대신 카드값은 전자기록으로 길게 남았다.) 허상은 짧고 여파는 길다. 결국 건강한 자아는 계획적 소비의 출발점이다.


  소비를 통제하고 물건을 최대한 줄이자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아직 짐이 많다. 나 역시 미니멀라이프와 맥시멀라이프 사이 어딘가 쯤에서 애매하게 머물고 있다.(역시 미니멀 라이프의 길은 어렵다) 오래된 물건을 처분하는 문제로 남편과 의견 충돌이 잦아 이제 함부로 물건을 버리진 않는다. (미니멀리즘은 반드시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고 가족 공동의 물품이 아니라 개인 물품에 한해서 실행해야 한다.) 현재는 필요 없는 물건은 버리되 아직 쓸모가 남은 물건들은 잘 찾을 수 있는 곳에 수납하고 이전보다 자주 정리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 감정을 소비로 연결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이 었다는 것이다. 헐값에 시간을 팔았던 최저가 검색 대책을 빌려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 살림을 꾸리는 데 하루의 시간을 골고루 배분했다. 건강한 루틴이 일상에 자리 잡으면서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차츰 안정되었다. 비싼 돈 주고 예쁜 쓰레기를 수집하던 소비 요정도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동안 무질서한 소비습관이  빠르고 쉽게 쾌락을 좇는 도시의 문화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우리경우를 보면 꼭 도시여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물욕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한적한 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에 대한 욕망은 귀한 것을 소유하고픈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엇을 욕망하고 어떤 형태로 쾌락을 느낄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사 후에 자주 숲길을 산책했다. 짙은 녹음으로 물든 숲 속을 느린 걸음으로 걸을 때,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코 끝을 스칠 때, 나무 사이로 찬란한 빛줄기가 쏟아지는 광경을 마주 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가 차올랐다. 나는 어쩌면  이 경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부질없는 헛발질에 매달렸던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자연은 아무리 소비에 열을 올려도 채워지지 않았던 충만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그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쾌락이었다. 비록 물욕이 완전히 사라지는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한 그게 가능할까?) 매일 하늘을 보고 나무를 어루만지고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사는 지금의 삶에 감사한다.  

이전 10화 시골 초등학교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