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아이라고 논밭에서만 뛰어놀지 않습니다
아이는 여덟 살이 되자 읍내의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일 년간 병설 유치원을 다녀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입학 전 우연히 시골 분교인 '무지개학교' 학부모들을 만났다. 그들은 시골학교에서 누리는 혜택과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를 읍내의 초등학교가 아닌 무지개학교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분교 학부모들이 들려주는 꿈같은 학교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전교생이 스무 명도 되지 않는 분교에서는 다양한 활동들이 일 년 내내 이어졌다. 봄이면 모든 아이들이 함께 채마밭을 가꾸었다. 그저 보여주기 식 체험이 아니라 농사가 업인 부모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니 농작부터 수확까지 단계별로 경험하는 실용적인 체험이 가능하다. 여름이 되면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 가족이 모여 잠을 자는 1박 2일 캠핑을 연다. 잔디가 깔린 오래된 학교 운동장에서 낭만적인 캠프파이어를 즐기는 아이들의 사진은 내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분교의 학부모들은 돌아가면서 일일 선생님을 자처했고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특강 수업을 주도했다. 겨울이면 저학년과 고학년이 다 함께 어울려 눈싸움을 하거나 거대한 이글루를 만들었다. 무지개학교의 아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학교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분교 학부모들의 영향이 커 보였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학교 행사와 회의에 참여했고, 단합력이 대단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의 외부 활동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엄마들끼리 소규모 동아리를 만들어 공예나 도예 같은 취미 활동을 펼치고 그로 인해 학부모들의 결속력은 더욱 단단해졌다. 교장 선생님과 학교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위해 학부모와 소통하고 다방면으로 협업했다. 분교는 이미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공동체였다. 그 공동체를 조화롭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선생님들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시간과 정성 역시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장밋빛 장점만 있어 보이는 분교에서도 불협화음은 존재했다. 학부모들끼리의 친분, 학교와의 협업이 무척 중요하다는 점은 반대로 학교 선생님 입장에선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전교생이 몇 명 되지 않아 아이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서열이 정해지면 몇 년 내내 서열이 변하거나 역전되기 힘들다는 소리도 들었다. 또 분교 역시 공립이다 보니 선생님들이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발령받는다. 열정적인 마인드로 다양한 교육 방식을 실험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있을 수 있다. 전임 교육자가 아무리 혁신적인 교육을 시도했어도 선생님이 바뀌면 말짱 도루묵이다. 공동체적 교육방식이 낯선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발령받은 선생님의 경우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제 막 부임한 젊은 신참 선생님의 경우 혼란은 더욱 배가 될 것이다. 기존 선생님이 하던 대로 공동체적 교육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학부모와 새로운 선생님 사이에서 잡음이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득 내가 과연 이 공동체적 마인드에 적합한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는 평소 학부모와의 소통은 고사하고 유치원 선생님과의 상담도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어쩌다 한 번씩 학부모의 초대를 받아 엄마들 모임이라도 다녀온 날이면 기가 빨려 오후 내내 드러누워 있었다. 말 많은 소규모 집단에서 눈치 빠르게 적응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병설유치원으로 옮길 때 가장 걱정하던 일은 등 하원 운전이었다. 아이와 나는 어린이집 차량으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병설로 옮긴 후 매일 아침 아이와 등교 전쟁을 치르며 학교까지 통학 운전을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등하교 운전에 익숙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야 하겠지만 집에서 더 멀리 떨어진 분교까지 매일같이 운전하다 보면 피로도가 훨씬 높아질 것이 자명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당시 오랜만에 구직한 직장에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도저히 직장생활을 하며 분교에서 이루어지는 그 많은 행사와 외부활동을 다른 학부모처럼 무리 없이 참석할 자신이 없었다.
수많은 고민 끝에 아이는 원래 다니던 읍내의 초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결정에 아쉬워하는 사람은 물론 나 하나뿐이었다. (남편과 아이는 당연히 원래 다니던 병설유치원의 초등학교로 진학할 생각이었나 보다) 읍내의 초등학교 역시 도시에 비하면 학생 수가 현저히 적은 편이다. 고학년은 한두 반씩 있고 저학년은 서너 반이었다. 멀리서 통학하는 아이들을 위해 노란색 스쿨버스가 다녔는데 자차를 타고 다녀서 이용해 보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시골 아이들이라고 다 논밭에서 뛰어놀지는 않는다. 요새는 시골 폐교를 활용한 교육 장소도 만들어졌고, 체험 활동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외부 교육 시설들이 많아졌다. 오래된 학교라도 새로운 리모델링과 최신식 설비를 더했기 때문에 교실 환경은 오히려 도시보다 더 쾌적했다. 아들애는 로봇 만들기나 코딩, 한자, 바둑을 학교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배웠다. 그 덕에 아이는 아마추어 바둑 대회에도 나가보고 한자 급수도 땄다고 좋아했다. 주말이면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근처 승마장에서 승마를 배웠다. 학원이나 사교육을 접할 수 없는 시골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새로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꽤 좋은 체험이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추첨 없이 이런 방과 후 프로그램과 돌봄 교실을 이용했고, 덕분에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시골의) 공교육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돌봄의 공백 없이 아이의 안전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어서였다. 갑작스럽게 코로나가 터졌을 때도 돌봄 선생님이 없었다면 당장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을 것이다. 코로나 초반엔 남편과 번갈아 월차를 쓰며 아이를 케어했지만 둘이서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돌봄 선생님들이 마스크를 쓰고 교실에 출근했다. 돌봄 선생님들의 노고를 알기 때문에 ‘돌봄 선생님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소리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도 그렇고, 학년이 바뀌고 새 학기를 시작할 때도 그렇고, 아이는 한 번도 적응 문제로 어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건 아마도 같은 학년이 네 반밖에 되지 않아 아이들끼리는 이미 모르는 얼굴 없이 서로서로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새로운 학년이 되어도 새 친구를 만난다는 설렘은 떨어진다) 나 역시 학교 행사나 학부모 모임에 갈 때마다 곳곳에 아는 얼굴들이 보여 익숙한 듯 눈인사를 나누었다. 호들갑 떨 필요 없이 아는 얼굴들과 정다운 안부인사를 몇 마디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풀렸다. 역시 나는 너무 적지도 너무 많지도 않은 읍내 학교의 숫자가 부담이 없다. 사람들과의 사이처럼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적당히 상대방의 체온이 느껴지는 이 애매한 거리가 지금의 우리에겐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