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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잉고잉 박리라 Dec 28. 2022

(D+71) 폐렴으로 인한 응급실행

사흘 만에 또다시 전원, 그야말로 병원 난민

아침에 병원 주치의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A병원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는 지정된 시간에 주 1회보호자 면회가 가능했기에 나는 엄마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 매일 같이 전화를 했었다. 그간 간호사 선생님과의 통화로 이번 주치의의 전화는  엄마의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대략 짐작이 가능했다. 인지가 정상적이지 않은 엄마는 A병원서 자주 콧줄을 뺏고 그 때문인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 혹은 다른 연유 때문인지 맥박이 빠르고 컨디션이 매우 쳐져 있는 듯했다. 

그래도 병원에 있으니 괜찮겠거니 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은 엄마의 산소포화도가 떨어져 있어 심각하게 위중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대학병원 응급실로 후송해 상태를 체크해보는 게 좋을 듯 하니 지금 보호자 1명을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의 간병을 위해 회사에 가사휴직을 요청해둔 태였으나 업무 마무리 및 인수인계 등의 작업이 남아있어 당장 움직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아빠에게 상황을 설명드리고 A병원으로 가 엄마와 함께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동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이직을 한지 이제 갓 1년 남짓, 게다가 엄마 간병을 위해 친정집으로 내려와 병원에 들어와 있으면 아이들도 잘 보지 못할 터였다. 엄마는 지금 내가 너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은데 나는 생각보다 쉽게 휴직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꽤나 오랫동안 갈팡질팡 중이었다. 하지만 대학병원 퇴원 후 재활병원을 알아보면서 면회가 주 1-2회 정도로 제한된 요즘 병원 환경은 나의 휴직 결심에 결정적 트리거가 되어 주었다.


인지가 정상적이지 않아 전화통화조차 불가능한 엄마를 병원에 맡겨두고 한 주를 겪으며, 담당 간호사로부터 엄마의 상태가 쳐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자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혹여나 누군가 엄마에게 함부로 대한 건 아닐까 온갖 좋지 않은 생각들로 마음이 심란했기에 휴직계를 낸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다 싶었. 조금만 빨랐다면 참 좋았을 테지만.

여하튼 A병원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간 아빠는 전화로 틈틈이 상황을 내게 알려주었는데, 현재 엄마의 상태는 음식물이 폐 쪽으로 조금 넘어가면서 흡인성 폐렴이 발생했고 그 폐렴으로 인해 호흡이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발 호흡이 아예 되지 않거나 산소를 많이 공급해야 할 만큼 위중한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엄마가 위중한 상태가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응급실에서 온종일 대기하며 이런저런 검사를 하느라 시간은 오후 5시가량이 되어가는데, 그 위중하지 않은 상태 때문에 엄마는 대학병원 입원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간호사로부터 건네들었다는 것이다. 응급실 간호사는 다시 A병원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폐렴치료를 할만한 병원을 찾아보고 엄마를 받아준다는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했다는데 아빠와 나로선 당연히 재활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폐렴치료가 우선이지 싶었다. 그래서 간호사 선생님께 일단 폐렴치료부터 해야겠으니 전원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날은 이미 어두워져 버리고 엄마를 받아준다는 병원은 거의 없는 모양인지 기다리고 기다려도 별다른 소식이 없는 체로 나는 회사에서 아빠는 응급실에서 애만 태웠다.


오늘은 마음과는 다르게 업무 마무리 때문에 평소보다 늦은 퇴근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A형 독감에 걸려 남편 역시 골골대는 형편이었지만 친정집까지는 본인이 운전을 하겠다며 어머님 아버님께 아이들까지 맡겨 두었기에 심장은 여전히 콩닥콩닥 빨리도 뛰었지만 온종일 지친 몸은 조금 달래며 내려갈 수 있었다. 아마도 남편은 밤눈이 어둡기도 하고 유리멘털인 내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가 친정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엄마가 입원할 병원이 간신히 정해졌으며, 사설 구급차를 타고 그 병원으로 후송된 상태라고 아빠에게 연락이 왔다.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아빠에게 연락 온 시간이 밤 10시. 온종일 응급실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을 그 시간이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새롭게 옮긴 병원의 응급실로 향하자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빠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셨는지 역시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내내 각종 검사와 대기를 반복한 엄마는 기저귀 교체 시기를 놓쳐 환자복 상하의가 다 축축해져 있었다. 응급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병실을 배정받았지만 이곳도 역시 보호자 1인 상주만 가능했다. 하루종일 힘들었을 아빠와 몸이 몹시도 좋지 않으면서도 두 겹의 마스크를 끼고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으로 버티며 서있는 남편을 속히 친정집으로 돌려보내고 엄마를 병실로 옮겼다.


병실로 올라오자마자 엄마의 기저귀를 갈고 환자복을 갈아입혔는데 아무래도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이기에 혼자서 옷을 갈아입히는 것만 해도 꽤나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음 아빠도 엄마도 조금 덜 힘들었을 텐데 두 분께 너무 죄송했다.


입원수속을 고 병실을 배정받고 올라와 환자복을 갈아입고 나니 이미 새벽 1시도 넘어있었지만 엄마 옆 간이침대에 누우니 엄마의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는 종종 기침을 심하게 했고 그 기침 소리에는 심하게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숨이 넘어갈 듯 힘들어했는데 엄마의 숨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자니 엄마가 정말 어떻게 될 것만 같아 너무 무섭다가 지금 내게 주워진 이 상황이 너무 버겁고 힘겨워 눈물이 났다.


두어 번 엄마가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것 같아 급히 벨을 눌러 간호사를 호출했고 간호사선생님들은 그때마다 뛰어와 엄마의 산소포화도를 산소 공급을 늘리고 가래를 뽑았다. 그러면 엄마의 숨소리는 조금 짖아 들었는데 어쨌거나 이곳이 병원이어서 정말 살았다 싶었다. 긴긴 하루였고 긴긴밤이었지만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밤을 그렇게 꼴딱 세고서 엄마 옆에서 수시로 흡입치료를 하고 아침 점심 저녁 콧줄 식사를 드리고 약을 먹였다. 종종 엄마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고 관심을 유도해보고 엄마를 닦아 드리며 또 하루를 보내니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흘렀다. 그래도 두 밤 사이에 엄마는 제법 숨소리가 좋아졌기에 첫날밤처럼 마음이 요동치지는 않았다. 다행이었지만 제대로 식사를 챙겨 먹을 겨를이 없어 1층 편의점에서 컵라면 같은 것들로 대충 먹고 쪽잠을 자니 몸이 너무 무겁고 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그리고 너무너무 자고 싶고 너무너무 씻고 싶은 마음이 들어 괴로웠다. 엄마의 간병을 위해 야심 차게 휴직까지 결심했는데 어쩌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쉽지 않을 것만 같아 좀 더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출근을 위해 이틀밤이 지난 뒤 간병인 여사님을 구했다. 다행히도 일당에 웃돈을 얹자 바로 와주실 분이 계셨다. 간병인 여사님께 한 주 동안 엄마를 부탁드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인지도 떨어져 있는 상태에 움직일 수도 없고 표현도 자유롭지 못한 엄마에게 과연 간병인 여사님이 잘해주실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직 휴직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기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저 주말 동안 엄마의 상태가 호전되는 게 보였으니까 주중엔 더욱 좋아지시길 빌어보는 수밖에. 간병인 여사님이 엄마에게 최소한의 도리는 해주시길 빌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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