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을 통해 ‘있음’을 재조명하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아침을 먹은 후 찰나의 여유를 즐기며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천둥이다!”
큰 아이는 밖에서 난 소리가 신기했는지 손뼉 치며 즐거워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치게 될 무시무시한 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쾅 소리가 들린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어디선가 ‘삐’하는 경보음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조금 전의 평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집 안은 온갖 소리가 뒤섞이며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가 보니 주방의 가스 경보기에서 ‘가스 누설’이라는 글자가 요란스럽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기계음 소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처럼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계속 듣다 보니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나 진짜로 가스가 누출되었을까 걱정되어 온 집안의 창문을 열어둔 채 잠옷 바람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급한 마음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힘껏 눌렀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눌러보아도 그대로였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반응 없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관리실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매일 아침 지나가던 조용한 길 위에서 익숙한 듯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으니 갑자기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출근해야 하는데 갑자기 물이 안 나와요! 무슨 일이죠?”
“전기가 갑자기 꺼졌어요! 왜 그런 거예요?”
저 멀리서 관리소장이 뛰어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조금 전 집에서 들었던 기계음만큼 날카로웠다. 1분이 5분처럼 소중한 아침시간에 갑자기 물도 안 나오고 전기도 끊어졌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나는 한 편으로 우리 집은 괜찮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이 나왔기 때문에 나오기 직전 손을 씻을 수 있었고 전기가 들어오기에 불은 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에게도 이런 운이 생긴다는 사실에 괜스레 뿌듯했다. 그때 나는 안도하거나 뿌듯해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지 앞에서 전기공사를 하던 중에 쿵 소리가 났다고 하네요. 지금 원인을 파악하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길게 이야기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관리소장은 질문한 사람들보다 더 다급하게 할 말을 전하고 곧바로 지하주차장을 향해 뛰어갔다. 전기공사, 쿵, 원인 파악…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 그것도 단순한 일이 아닌 큰일이 생긴 것이다.
정신없이 뛰어내려 가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생각했다.
‘설마 우리 집도 물이 안 나오고 전기가 꺼지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자’
집에 도착하니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를 틀어보니 물도 잘 나온다. 정말 우리 집은 괜찮았다. 그때까지는...
샤워를 하고 나오니 안내방송을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리소장이었다. 조금 전보다 담담해진 목소리로 금일 외부 공사로 인해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해 오후 4시까지 정전과 단수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설마 했던 일이 진짜 일어나고야 말았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오전 9시였다. 엊그제 막 돌이 지난 둘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문득 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당장이라도 깨어나고 싶은, 아주 무서운 악몽이었다.
수압은 점점 약해졌고 잠시 후 불이 꺼졌다. 모든 가전제품이 멈추니 집 안은 적막함과 고요함으로 채워졌다. 매일, 아니 몇 년을 살아온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 낯설고 무서워진 순간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열불’이 올라왔지만 어디를 향해야 할지 방향을 잃은 마음들은 이내 차분해졌다. 화를 낼 대상도 없었고, 화를 낸다고 해결될 상황도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깊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짐을 챙겨 집을 빠져나왔다.
무작정 도착한 복합몰은 오늘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서 신나게 놀아야지’라고 생각했지만 화려한 조명, 멋진 매장, 예쁜 옷, 맛있는 음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4시에 집에 돌아갔는데도 고쳐지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은 여전히 물과 전기의 부재를 걱정하고 있었다. 당연하게 생각해서 존재 자체를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물과 전기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다행히도 나의 걱정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었다. 다시 돌아간 집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그날따라 저녁밥은 유난히 더 맛있었고 집 안은 더 환하고 밝아 보였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당연하지 않다.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공기, 물, 가족과의 하루.. 항상 내 주위를 채워주며 보통, 일상, 평범함, 단조로움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은 사실 특별하다. 그날 하루 나는 언제든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있는 공간과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과 전기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소중함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나가기 전에 매 순간 감사하고 사랑하며 후회 없이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