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스스로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로 마음먹다

by 유메이

큰 아이는 요새 그림 그리기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처음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것들을 끼적대더니 언제부터인가 제법 동그라미, 네모, 세모처럼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혼자 그리고 색칠했다는 그림을 가지고 와서는 ‘작품’이라고 불렀다. 아이의 작품을 자세히 보니 자유로운 선과 알록달록한 색깔이 미술관에서 만났던 인상주의 화가의 무언가를 떠오르게 한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본인이 표현하고 그리고 싶은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아이는 속상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멋진 그림인데도 아이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기대감에 다가가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한 어른들처럼, 때때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속이 상했던 이유를 물어보니 선이 삐져나왔다거나, 색 조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혹은 색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듯 디테일한 속상함의 원인들을 설명하면서도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는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엄마: 괜찮아, 다시 그리면 되지- 지금도 너무 예쁘고 멋진 걸?

아이: 아니야! 그래도 괜찮지 않아!


한창 자아가 형성되며 자기주장이 강해진 미운 네 살. 어느새 맞는 것은 맞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훌쩍 커버린 너. 내가 괜찮다고 말해도 본인은 괜찮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오히려 당당함, 솔직함 그리고 용감함이 어딘지 조금 멋져 보이고 부러웠다. 아이를 안아주면서 마음이 괜찮지 않으면 괜찮아질 때까지 울어도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널브러진 스케치북, 색연필과 사인펜을 거의 다 정리해 갈 무렵, 어느새 아이는 내 옆에 와서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긋 웃으며 나를 도와준다. 이제 정말 괜찮아진 모양인 듯하다.




매년 늦가을과 초겨울에는 한 해 동안의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 해를 준비한다. 올해도 여느 때와 비슷했다. 당장 급한 일은 없지만 나 그리고 우리가 함께 내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에게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 그 순간, 질문을 했던 상대방의 알 수 없는 표정과 끄덕거림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어야 했다. 오랜만의 출근이라 현실감각이 무뎌진 탓일까. 해야 하는 일을 그저 해 내는 것이 회사 생활의 근본임을 알면서도 혹시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작디작은 기대를 했었나 보다.



실망은 기대가 있을 때 더 크게 다가온다. 며칠 전 나에게 질문을 했던 사람을 같은 공간에서 다시 만났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지난번과는 달리 다소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분의 일방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의 상황이나 조치가 결국 나에게 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꽤 긴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 즈음, 처음으로 나에게 괜찮은지를 물었다.


그 사람 : 이렇게 진행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나 : …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런데 나만 빼고는 모두가 괜찮은 상황이었다. 머릿속에 가득 찬 수많은 ‘괜찮지 않다’들이 너도 나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회의실에 앉아 있는데도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내 안의 용감함을 다 써버린 걸까, 아니면 나는 원래 용기가 부족한 사람인 걸까. 나는 괜찮지 않다는 그 한 마디를 결국 전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적어도 나를 위해 괜찮지 않다고 말했어야 했다. 나는 괜찮지 않다고, 당신들이 괜찮은 거지 내가 괜찮은 것이 아니라고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냈어야 한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가 달려온다. 갑자기 나를 와락 안더니 ‘엄마, 괜찮아’라고 말한다. 하루 종일 안아주지 못했던 내 마음을 아이가 제일 먼저 토닥이고 위로해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나에게 서서히 전해진다. 그제야 괜찮지 않았던 마음도 정말 괜찮아진 듯하다.



나 자신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용기 있게 말하는 아이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는 달라져야겠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지,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통 모르겠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 다가올 괜찮지 않은 일들을 향해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당당히 말할 것이다. 그래야만 나와 너, 우리의 날들이 오늘보다 조금씩 더 괜찮아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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