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다
10년째 매일 사용 중인 선크림이 있다. 모 연예인은 햇빛이나 형광등에서 나오는 자외선 차단을 위해 집안에서도 꼭 선크림을 바른다고 할 정도로 선크림은 기본이자 필수 중 하나인 화장품이다. 뭐든지 기본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인지 선크림도 브랜드와 제품마다 제형과 발림, 밀림과 혼탁함, 끈적임과 따가움 등 신경 쓸 요소가 많았다. 기본이지만 기본이기에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제품을 찾기가 유독 어려웠기에 오랜 기간 동안 나는 선크림 유목민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일본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A제품을 선물 받고는 어렵사리 유목민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년 후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발생했고, 매일 쓰는 기본 제품이라 괜스레 더 신경이 쓰여 다시 나의 유목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구나 들어 보았을 유명한 제품이나 친구가 강력 추천한 제품을 다 써봤지만 아쉽게도 ‘이거다!’ 싶은 나만의 선크림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 이번에도 의외로 해답은 친정엄마의 화장대에 숨겨져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 방에 몰래 들어가 색조 화장품을 이것저것 발라보다가 혼나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엄마 화장품은 일명 ‘아줌마 화장품’처럼 느껴졌다. 한 때는 나의 로망이기도 했던 엄마의 화장대보다는 나는 내 화장대를 채우고 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엄마는 지금도 나보다 피부가 좋은 60대다. 어느 날 같이 밥을 먹는데 엄마 피부가 너무 반짝여서 무슨 제품을 쓰는지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대부분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방판 전문가를 통해 구입한 제품이었다. 하나 더 있으니 써보라고 건네주었던 바로 그 선크림이 나의 인생 선크림이 되었다. 언제나 내 인생에 찾아오는 위기의 순간마다 엄마가 나를 구해주었듯이, 이번에도 엄마 덕분에 선크림 유목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출근 준비 중에 갑자기 선크림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일단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밀려 나온 선크림을 휴지로 지워내고 다시 덧발랐다. 그럼에도 계속 때처럼 밀려 나오는 통에 1분 1초가 급한 황금 같은 아침 시간임에도 세수를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결국 회사에 늦게 도착했고 여전히 얼굴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하얀 껍질들을 수습하느라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에센스의 잘못일까
수분크림의 잘못일까
선크림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의 잘못일까-
때마침 열어본 이메일 리스트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제목부터 오타를 남발한 K 과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을 때는 그저 성격 좋고 유쾌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K 과장(님).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후, 나는 핸드폰에 저장된 K 과장님의 ‘님’ 자를 지워 버렸다. ‘님’ 대신 ‘새끼’라고 바꾸어 쓰고 싶었지만 함께 일하면 자주 연락을 주고받을 예정이라 꾹 참았다. 다행스럽게도 같이 일한 지 6개월 정도 뒤에 K 과장은 다른 팀으로 자원해서 이동했다. 어쩌면 K 과장의 핸드폰에는 내가 OOO 새끼로 저장되어 있었을지도-
하물며 화학 제품 사이에도 케미가 이토록 중요한데 함께 일하는 사람 사이에 케미는 오죽하겠나 싶다. 우리가 함께 일하는 게 불편한 이유가 내 탓 아니면 그 사람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리 둘 모두의 탓일지도 모르겠다. 로션도, 선크림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듯이 우리 각자는 잘못이 없다. 다만 만나면 안 될 사람이 만난 것처럼 함께 일하면 안 되는 사람이 함께 일한 것. 그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원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황금 같은 팀 워크를 자랑하는 케미 좋은 팀원들을 만나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단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정 제품만이 나의 인생 선크림이 된 것처럼 우선 스스로가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기본 때로는 기본 이상을 해낼 수 있으면 누구와 일하든지 적당한 수준의 케미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조금 많이 부족한 사람, 예를 들어 K과장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일을 끌고 갈 수 있다. 서로 간의 케미가 별로 좋지 않은 경우에는 양쪽 모두 일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일이 중단되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다.
그다음은 나와 일의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이 부분은 약간의 운명학적 요소가 필요하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선택의 폭이 조금 더 넓어질 수 있다. 최근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 직장생활 10년 차 이상이 되니 메일 쓰는 형식만 보아도 이 사람은 일을 잘하겠구나, 이 사람은 일 마무리가 조금 엉성하구나라는 대략적인 감이 생겼다. 운 좋게 나에게 업무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요점만 깔끔하게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주던 L과장님의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결과는 역시. L과장님이 ‘어’라고만 해도 나는 찰떡같이 알아 들었고 내가 ‘아’라고만 해도 과장님 역시 귀신같이 이해했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을 거의 못한 채 서로 집에서 원격으로 작업하고 오직 이메일과 몇 번의 통화만 주고받았음에도 짧은 시간 동안 꽤 그럴듯한 아웃풋이 나올 수 있었다. 나와 L과장님은 커피를 좋아하는 취향마저 비슷한 특급 케미였던 것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변화시키며 매일을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 서로에게 적당한 케미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나로 인해 힘들었을 누군가에게는 미안함을, 나와 함께하는 순간들이 고마웠을 누군가에게는 나 또한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나 역시 회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인생 선크림처럼 대체 불가능한 한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