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기술과 금융의 분권과 자유
그게 가능하다고 하는데
블록체인 네트워크로 암호화폐를 만들면
섬나라 주민은 중앙기관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섬나라의 만물박사
한참이나 창밖을 내려다본 후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목이 마른 지 시원한 물을 달라고 한다. 냉장고에 있는 생수 한 병을 꺼내주니 벌컥벌컥 들이켠다. 하기야 계속 말을 했으니, 목이 탈 만도 할 것이다. 물을 마신 그가 다시 말을 시작한다.
"형님, 섬나라 주민들은 돈이 많아지면 물가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육지에서 통화를 마구잡이로 늘리는 바람에 서민들 살림이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죠. 놀라운 것은 섬나라 주민들도 지금의 중앙집권식 금융 제도의 문제점과 금융기관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워낙 금융 위기가 자주 터졌으니 말이야."
"섬나라 주민들은 새로 만들 화폐는 누구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중앙집중식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관리하면 여러 가지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목격했죠. 지금까지 그들이 추구해 온 정치와 경제의 철학인 자유와 분권을 화폐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자유와 분권을 보장하는 화폐 제도라? 그게 가능할까?
"그게 무척 까다로운 이야기죠.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할 사람의 실력이 중요해요. 이제는 누가 이 일을 담당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남았어요. 공신력 있는 기관이 개입하지 않고 화폐의 신뢰성과 안전성을 보장하기는 무척 어렵죠. 이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금융 지식과 컴퓨터 공학 지식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미스터 하버드의 고민
누가 프로젝트를 담당할 것인지를 두고 섬나라 사람들이 의논을 나눈다. "그 일이라면 만물박사인 미스터 하버드 씨에게 맡기는 건 어떨까요?"하고 한 주민이 제안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찬성한다. "좋아요. “ 미스터 하버드는 잠시 당황했지만, 한번 해 보겠다고 답한다. 사람들은 모두 미스터 하버드에게 감사의 인사와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미스터 하버드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다. 하도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서재로 갔다. "사람들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해 거절할 수 없지만, 무척 까다로운 주문이야"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책상 위에 메모지를 펼쳐놓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끄적거렸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섬나라는 서로가 믿고 물건을 사고팔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화폐를 발행하면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어. 누구도 독점하지 않는 화폐를 발행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금융기관이 없다면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금융 거래나 상업 거래를 중개하는 기관을 둘 수도 없으니 까다로운 문제야. 자칫하면 육지 나라가 겪고 있는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과 거래 수수료 문제를 그대로 겪을 거야."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암호화폐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미스터 하버드는 이미 사토시 나카모토의 논문을 읽었다. 그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는 암호화폐 연구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차움 David Chaum이 1980년대 초반에 쓴 논문까지 모두 읽었다. 차움은 많은 암호화폐 연구자와 공동 연구를 통해 비트코인의 전신인 암호화폐를 개발했다. 이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미스터 하버드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섬나라 화폐 개발을 서둘렀다.
섬나라의 분산(공유) 원장과 블록체인
섬나라 주민들은 물물교환 대신에 화폐를 통해 거래하기로 결정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대가로 주고받는 화폐 거래를 중개하는 기관이 없다. 대신, 사람들 사이에 돈거래가 이루어지면, 그 내용을 장부에 기록한다. 거래 내용을 기록한 원장(元帳)을 섬나라 주민 100명이 모두 나눠 갖는다. 거래 원장을 모든 주민이 분산하여 공유하고, 이것을 분산(공유) 원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 모두가 거래에서 발생하는 원장을 공유한다면, 그 내용을 조작하거나 변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와 상대의 원장만 조작해서 될 일이 아니고, 마을 주민이 갖고 있는 원장을 모두 조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고 돈도 없으면서 계약을 체결하거나 이중으로 계약을 체결하려고 한다고 하자. 나머지 99명에 분산된 원장은 이 거래 시도를 거절할 것이다. 섬나라 주민이 가진 거래 원장의 잔고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미스터 하버드가 무릎을 ‘탁’ 치며 혼잣말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거래 원장을 모두가 공유하면 신뢰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구나, 이렇게 하면 금융기관의 개입 없이도 안전하게 화폐와 금융 거래를 실행할 수 있어."
그는 이 방법을 이용해 섬나라 화폐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금융 거래를 기록한 원장을 '임시 상자'에 담아 둔다. 이 '임시 상자'에는 거래가 끝난 원장들이 들어 있다. 이 원장에 기록된 거래 내용이 유효한지 검증받기 위해 대기하는 것이다. 검증자가 '임시 상자'에서 원장을 꺼내 유효성 검증을 시도하는 순간, 어려운 퍼즐 문제가 나타난다. 검증자가 이 퍼즐 문제를 풀게 되면 이 원장의 거래들은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이제 유효성 검증이 확인된 원장들은 정식 보관 상자로 옮겨지고, 상자 뚜껑을 닫고 자물쇠가 채워진다.
검증자는 다시 '임시 상자'를 열고 유효성 검증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원장들을 꺼내 퍼즐 문제를 푼다. 다시 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유효성 검증을 마친 원장들을 새로운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잠근다. 새롭게 생성된 상자를 이전의 상자와 체인으로 연결해 묶어버린다. 거래 내용이 담긴 모든 원장은 자물쇠가 채워진 상장에 담기고, 수많은 상자는 서로 체인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사실 분산(공유) 원장이란 말은 바로 체인으로 묶은 상자를 분산해서 갖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이 상자를 열 수도 없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원장을 변조할 수 없다. 이 기술을 디지털 네트워크상에서 구현한 것이 블록체인 기술이다. 거래 파일을 담은 블록과 블록을 암호로 연결하는 것이다.
"형님, 섬나라의 만물박사 미스터 하버드의 생각이 이해가 갑니까?"
"뭐, 대충 감은 잡히는데 아직은?"
"그럴 겁니다. 미스터 하버드가 생각한 거래 방식은 앞으로 이야기할 블록체인과 섬나라 암호화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블록체인 기반의 섬나라 암호화폐 이야기를 듣는다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우선 미스터 하버드가 말한 '상자'는 블록을, '자물쇠'는 암호화를, 그리고 '체인'은 블록들을 연결하는 암호체계를 상징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세요. 이것들을 컴퓨터 네트워크상에서 구현한 것이 블록체인 기술이고 암호화폐입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주세요."
"오케이. 당연히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