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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09. 2022

비 오는 아침, 벨레 에포크의 고흐와 신윤복

비가 오면 까무러치게 예쁜 도시

이른 아침 짙게 드리운 구름이 그예 비를 뿌렸다. 일요일 도시의 회색 건물은 아직 게으른 잠에 빠졌다. 바람은 연신 나무를 흔든다. 잎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잔뜩 주어 마른 가지의 여린 팔목을 꽉 잡는다. 개중에 힘에 부친 녀석들은 땅 위로 떨어져 빗물에 젖는다. 아직 잎들은 꽃단장을 마치기 전이라 본격적인 결별의 시간이 시작된 건 아직 아니다. 나뭇잎들이 화려한 옷으로 먼 길 떠날 채비를 마치면 아름다운 이별을 맞을 것이다.     


도시에는 가을비의 축제가 열린다. 차들이 지나는 자리엔 물방울이 튄다. 까만 우산 사이로 드문드문 노랑과 빨강 우산이 춤추듯 걷는다. 길을 나선 사람들은 한결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민다. 바람이 불라치면 빗방울이 후드득 흩날린다. 행여 옷이 젖을까 우산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이런 날은 거리도, 마음도 가을비에 젖는다.      

     

비가 내리면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창으로 손 내밀어 빗방울을 맞아도 좋다. 다른 한 손으로 따뜻한 커피잔을 든다. 물기에 젖은 커피 향이 유난히도 묵직하다. 킬리만자로일까 아니면 볼리비아일까? 먼 이국의 깊은 산속의 커피 향이 내 방을 가득 메운다. 적도의 여름 태양이 얼마나 뜨거웠을까. 커피는 깊은 맛과 향을 낸다. 진하고 쌉쌀한 맛이 혀끝에 감긴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2011년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비에 젖은 파리의 풍경을 멋지게 연출했다. 그는 파리는 비가 내리면 까무러치게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했다. 비에 젖어 아름답지 않은 도시란 없지만, 비 오는 날의 파리가 아름답긴 하다.



영화는 시작 후 약 3분 30초 동안 파리의 구석구석을 제대로 보여준다.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내려다본 파리, 루브르, 노천카페, 모퉁이의 예쁜 꽃집, 비에 젖은 파리의 거리, 밤의 에펠탑 등등 어느 한 곳 빠지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도 아무 말 없이 시드니 베셋(Sidney Bechet)의 재즈풍의 색소폰 연주가 아름다운 'Si Tu Vois Ma Mere(만일 우리 엄마를 본다면)'만 흐른다.      


주인공 길(오엔 잭슨)은 밤 12시 파리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클래식 자동차를 타고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1920년대의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살바도르 달리, 헤밍웨이, 스콧 피체랄드, 장 콕도, T.S 엘리엇 등 당대의 문호와 예술가들을 만난다. 길은 몽환적인 여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야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 그녀와 함께 과거로 가는 마차를 탄다. 그녀가 동경하는 1800년대 말 예술의 벨레 에포크(Belle Epoque, 좋은 시절)로 간다. 그들은 물랭루주에서 르네상스 시절을 동경하는 로트렉과 고갱 그리고 에드가 드가를 만난다.   

  

과거에 머물 수 없던 길은 벨레 에포크에서 아드리아나와 헤어진다. 헤밍웨이의 1920년대도 뒤로 하고, 2011년의 현재로 돌아온다. 비 내리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는 약혼녀 이네즈(레이철 맥아담스)와 헤어진다. 혼자 길을 걷다가 가브리엘(레이 세이두)을 만난다. 비 오는 파리를 끔찍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비 오는 파리의 밤거리를 함께 걷는다.


1800년대 중반 유럽을 휩쓴 일본 채색판화

1800년대 중반 미국의 무역로를 이용해 유럽에 진출하려 했다. 미국 함대가 이런 일본의 계획을 방해했다. 하는 수 없이 일본은 직접 유럽과 접촉을 시도했다. 1862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인 일본의 문화는 서양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일본은 1867년 파리, 1873년 빈 박람회에서 일본 제품을 소개했다. 장식품과 도자기 등 이국적 특징을 지난 다양한 일본 제품들은 서양인의 취향을 저격했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 예술은 18세기에 이르러 섬세한 기술과 화려한 색깔을 입혔다. 이러한 섬세한 색채 기법으로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목판화로 표현했다. 일반적인 그림과 다른 목판화를 전문화한 것이다. 서민 생활을 목판화로 표현한 기법은 일본 전통 회화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 내에서는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본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일본의 풍속화가 정작 인기를 끈 곳은 멀리 떨어진 유럽에서다. 섬세한 기법과 화려한 색채의 일본 목판화는 작품으로 유럽에 건너간 것이 아니다. 일본 도자기 그릇이나 무역 생산품을 싸는 용도로 목판화가 사용됐다. 유럽의 화가들은 내용물보다 포장지인 목판화에 크게 매료됐다.       


간결한 구성과 단조롭지만 통일된 색채를 중시했던 일본의 판화 미술은 서양의 아카데미 미술의 경직성과 대비가 되었다. 많은 유럽의 화가들이 일본 판화를 수집하고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모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에드가 드가, 클레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화가들도 동참했다.      


자포니즘(영어: Japonism) 또는 자포니슴(프랑스어: japonisme)이라 불리는 1800년대 중반에서 후반 유럽을 휩쓴 일본풍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일본을 좋아하는 취미에 그치지 않고, 일본풍을 작품 안에서 살려내는 새로운 미술 흐름으로 발전했다. 모네와 고흐 등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본 채색판화인 ‘우키요에(浮世畵)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우키요에’는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 혹은 ‘뜬구름 같은 세상의 그림’이라 뜻의 그림 화풍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그린 채색판화의 화풍으로 일본 에도시대(1603~1867)에 유행한 ‘에도화’라 불리기도 한다. 안도 히로시게가 대표적인 작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모네와 고흐 등 많은 인상주의 화가가 그의 작품을 모방했다. 고흐의 '비 내리는 다리(1887)'는 히로시게의 '아타게 다리의 소나기(1875)'를 모방한 걸로 알려졌다.

      


고흐는 종종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그림 중 일부가 일본 판화를 모방했다는 것을 알렸다. 비록 일본에서는 환영받지 못해도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 사이에는 큰 인기를 끈다는 말도 했다. 파리의 많은 화가가 판화를 좋아했고 열렬한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고흐도 일본 판화를 수집했고,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다. 특히 그는 유명 판화가인 안도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를 모방하고, 또 자신의 작품에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사용했다.    


                

탕기 영감(1887) - 빈센트 반 고흐

 

고흐가 1887년 가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탕기 영감’의 배경에는 일본 판화작품인 우키오에가 많이 보인다. 그는 우키요의 생생하지만, 평면적인 색채를 선명하고 강렬한 자신의 색채와 결합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일본인이 그들의 작업에서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분명히 하는 태도가 부러워. 그것은 결코 우둔한 것이 아니고, 급히 서두른 것으로 보이지도 않아. 그들의 일은 호흡처럼 단순하고 그들은 마치 단추를 끼우듯 간단히 정확한 몇 줄의 선으로 인물을 그려. 아아, 나도 몇 줄의 선으로 인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해..”     

 

고흐가 신윤복의 그림을 봤다면

고흐는 작품이 팔리지 않는 가난한 화가의 고단함과 궁핍한 삶을 살았다. 끝내 동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좌절했다. 그런 그가 일본 풍속화를 보자 가난한 화가의 이상향으로 착각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아무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런 나라로 여겼다. 일본 판화에서 보는 느낌을 투영해서 이상향으로 생각한 것이다. 마음 여리고 곤궁한 그에게는 척박한 현실을 벗어나는 꿈의 대상이 필요했다.


고흐가 일본 우키오에를 모방하고 일본을 이상향으로 삼은 것은 일본의 실체를 모르고 한 것이다. 그저 환상 속의 나라로 상상했다. 고흐가 일본의 본질을 사랑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다. 더구나 고흐는 늘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으니까.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

                                 

만일 고흐가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를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간결하면서 섬세하고 역동적인 무용수의 칼춤을 보고 감동했을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옷고름, 주황색과 붉은색의 감각적인 색감, 역동적인 춤사위가 고흐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고흐는 조선의 풍속화를 모방했고, 유럽에는 자포니즘이 아니라 코리아즘(Koeasme)이 널리 퍼지지 않았을까.

                

 오는 아침 고흐의 그림을 보고 벨레 에포크와 신윤복을 생각한다. 만일 조선이 일찍 개방정책을 폈다면 우리의 문화가  일찍 유럽에 알려졌을 것이다. 어쩌면 K-Culutre 100 전에 유럽을 강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우리 문화가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니 자랑스럽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했다. 100년도  전의 될성부른 떡잎이 거목으로 쑥쑥 자란다.


모든 것은 인연에 달렸다. 인연이 있으면 만나고, 인연이 없으면 만나지 못한다. 고흐가 조선의 화가들을 만나지 못한 것도 인연이 없어서다. 아무리 화려한 시작이라도 때가 다하면 끝난다. 유럽의 예술가들이 자포니즘에 열광한 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 삶도 그러하니 인연이 다할 때까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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