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의 농노보다 일을 더 많이 하다니?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 회사 가기 싫다. 숫제 회사 다니기가 싫다. 확 사표를 던질까 보다. 마음으로야 백 번도 사표를 던졌다. 당장 그러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자. 출근해야 월급 받지, 뭐 별수 있냐.
‘국내 근로자 10명 중 2명 이상은 출·퇴근하는 데 두 시간 이상 허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근 시간이 길수록 일에 대한 만족도는 떨어지고, 아예 직장을 옮기려는 근로자도 많았다. 체력과 비용을 출·퇴근으로 허비하고, 여가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22년 6월 16일 중앙일보 경제면에 실린 내용이다.
대부분 직장인은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려 늘 바쁘다. 집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기면 좋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면서 삶의 질이 엉망이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시달리다 보면 정작 출근해서 일할 의욕이 사라진다. 차를 가지고 출퇴근해도 교통 체증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지하철이 있고, 버스도 있고 뭐가 불편하냐고 힐난한다. 사실 그렇다. 교통수단은 옛날에 비해 너무너무 좋아졌다. 그런데 왜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은 거꾸로 늘고 힘이 들까?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건 뭐 출근하는 데만 하루에 1시간은 기본이고 1시간 반이면 보통이니 말 다했다. 그것도 해가 갈수록 시간이 야금야금 늘어나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그뿐이면 말도 안 한다. 성능 좋은 컴퓨터에다 각종 문서 편집용 소프트웨어가 쏟아진다. 심지어 스마트 폰으로도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편리하기가 한정 없다. 예전에 몇 시간 걸리는 업무도 지금은 몇십 분이면 끝낸다. 그런데 왜 직장인들은 여전히 바쁜가?
첨단 기기의 도움으로 일을 빨리 처리하면 느긋할 줄 알았다. 기대와 달리 업무를 끝내고 돌아서면 새로운 일거리가 배당된다. 회사에서는 자동화로 업무 효율성이 증가한 만큼 직원의 수를 줄인다. 원가 절감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뽑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업무량이 늘고 더 바빠진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이래저래 직장인만 죽을 맛이다.
미국인이 중세 유럽의 농노보다 더 많이 일한다. 그것도 세계 1위의 경제 대국 미국의 노동자가 말이다. 중세 13세기 유럽은 역사의 암흑기다. 이 시기의 농노는 1년에 1,620시간 일했다. 반면, 2006년 미국 노동자의 1년 노동 시간은 1,804시간이다. 크레이그 램버트의 저서 『그림자 노동의 역습』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국의 노동자가 중세 시대의 농노보다 일을 더 많이 한다니? 놀랄 '노'자다. 우리나라 직장인은 이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일하니 까무러칠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직장인은 차라리 중세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겉으로 보이는 것만 이렇고, 그림자 노동까지 보태면 입이 쩍 벌어진다. 이러니 직장인의 삶이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문하고, 받고, 자리 정리까지 내 몫이다.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하고 각종 스마트 기기가 쏟아질수록 일거리만 잔뜩 늘어난다. 그것도 눈에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증가한다. 눈에 띄지 않으니 당연히 대가도 없다. 이것을 그림자 노동이라 한다. 처음 이 말을 사용한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 Ivan Illich)다. 그는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인 예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을 들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레이그 램버트(Craig Lambert)는 『그림자 노동의 역습』에서 이 말을 더 확대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실제 일을 하지만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 말한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일은 했지만,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형 마트나 커피숍의 터치스크린 주문, 식당의 셀프서비스, 셀프 주차, 물건을 사고 직접 박스에 담는 등 셀 수도 없다. 원래는 판매자가 사람을 써서 당연히 제공했던 서비스다. 카페에 가면 더 노골적으로 그림자 노동이 판을 친다. 손님이 주문하고, 기다렸다가 커피를 받고, 잔과 쟁반까지 정리한다. 가격 할인이라는 명분으로 자동화했지만, 슬그머니 가격은 올라간다. 도대체 소비자는 뭐가 좋아졌지?
당장은 재화와 서비스를 싸게 살 수 있다. 또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이 아니라 내가 여행 계획을 짤 수 있다. 가구를 직접 조림함으로써 내 기회에 맞출 수도 있다. 여기에 포함된 그림자 노동은 내 개인 취향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다. 문제는 그 일이 과거 다른 사람이 돈 받고 하던 일을 내가 무급으로 한다는 데 있다.
가구를 직접 만들면 내 취향을 발휘하는 약간의 자율성을 보장 받는다. 대신에 회사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 직장인이 해야 할 일은 늘어난다. 더 큰 틀에서 보면,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율성과 여유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IY(Do It Yourself)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상관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크게 보면 자기 인생의 통제권을 상실한다는 면에서 꽤 기회비용이 크다.
고속열차, 지하철, 그림자 노동의 역습
고속철도가 개통되기 전 제일 빠른 기차는 새마을호다.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다면 하루 만에 일을 보기 빠듯하다. 예전에는 직장인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면 1박 2일 일정으로 일을 본다. 일을 마치고 저녁 시간에는 자갈치 시장을 둘러보는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고속열차를 타고 서둘러 일을 마치면 저녁 늦게라도 서울로 올라올 수 있다. 그럼 다음날 회사로 출근해야 한다. 1박 2일의 여정이라면 아름다운 광안리 밤바다를 걷거나 바닷가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 잔 마실 여유가 있다. 고속열차가 이동 시간을 크게 단축했지만, 오히려 우리는 더 바빠졌다.
지하철역이 들어서면 역세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다. 덩달아 집세도 올라간다. 지하철이 연장되는 기쁨은 잠시고 또 월세가 오른다. 지하철 노선이 길어질수록 직장인들은 더 멀리 외곽으로 밀려난다. 과거에는 버스로도 30분 정도면 될 출근 시간이 짐짝 지하철로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회사를 위해 봉사하는 시간이 근무 시간에다 두세 시간의 출퇴근 시간이 보태졌다. 출퇴근도 분명히 회사를 위한 노동이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이것을 봉급으로 계산해 줄 리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 노동만 잔뜩 늘었다. 이러니 출퇴근이 힘들어 회사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확~~ 때려치우고 장사나 할까?'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통장 잔고가 빠듯하다.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직장인들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산다. 그들은 바쁜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달려간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