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라의 0과 1의 예술
약 139년 전, 프랑스 파리의 조용한 화실에 26살의 젊은 화가가 308 x 207cm의 큰 캔버스 앞에 섰다. 그는 붓질하지 않았다. 대신, 붓끝으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색의 점을 찍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붓질은 없었다. 색을 섞는 일도 없었다. 팔레트 위에 만든 순수한 물감 색을 그대로, 작은 점으로 하나하나 찍었다. 그는 무려 2년 동안, 이 단순한 작업을 반복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적어도 300만 개 이상에서 최대 500만 개의 점을 찍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이다. 작품 전체를 이루는 수백만 개의 점, 그림에는 오직 화가 찍은 점밖에 없다. 가까이에서 보면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색점들의 숲. 하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강변의 오후 풍경이 펼쳐졌다. 강변의 햇살, 산책하는 사람들, 피크닉, 그늘 속의 숨결까지 느껴진다.
이 거대한 그림 속에는 숨겨진 비밀이 하나 더 있다. 쇠라는 단순히 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색채 이론에 기반해 점과 점 사이의 ‘시각적 혼합(Optical Mixing)’을 실험했다. 예를 들어, 파란 점 옆에 노란 점을 찍으면, 멀리서 볼 때 우리 눈은 그것을 녹색으로 인식한다. 붓질로 물감을 섞는 것이 아니라, 눈 속에서 색을 섞게 만드는 것이다.
이 방식은 당시 미술계에서는 너무 낯설고 기괴하게 여겨졌다. 쇠라는 인상주의의 감성적인 붓질을 버리고, 수학처럼 계산된 점으로 색과 공간을 다루었다. 그래서 그의 화풍은 '신인상주의' 또는 '점묘주의(Pointillism)'라 불리게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프랑스는 에펠탑 건설이 한창이었다는 사실이다. 쇠라는 눈앞의 현실을 섬세한 감성으로 그리던 시대에, 과학과 논리를 도입해 예술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130년 전 화가의 픽셀
붓질 하나 없이, 감정 표현 없이, 그저 점 하나하나로 만든 이 풍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놀라운 평온과 정서를 자아낸다. 과학과 예술이 만났을 때, 그 접점에서 얼마나 깊은 감동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연속적인 채색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붓질 없는 그림을 그렸다. 미세한 점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우리 눈의 착시 현상이다. 우리 눈은 점과 점 사이의 불연속적인 공간을 마치 전체 그림이 붓질로 부드럽게 이어진 것으로 본다. 불연속이 연속으로 보이는 눈의 착각이다. 안타깝게도, 천재화가 조르주 쇠라는 만 31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쇠라가 찍은 최대 ‘500만 개의 점’은 실제 색을 입힌 부분이고, 그 사이의 여백이나 캔버스 면의 미세한 공간도 약 500만 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마치 디지털 사진에서 색이 채워진 픽셀과 색이 없는 공간(배경)이 공존하는 것과 유사하다. 조금 확대해서 말하자면, 130년 전 쇠라가 시작한 점의 예술이, 오늘날 디지털 화면을 구성하는 픽셀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쇠라 본인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세상을 쪼개는 기술, 디지털
디지털 기술은 연속적인 세상을 잘게 쪼갠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0과 1로 이루어진 새로운 언어, 즉 두 개의 수로만 이루어진 문법으로 표현한다. 특히 컴퓨터는 0과 1이 8개씩 묶인 하나의 단위, 즉 1바이트(byte)를 기본 언어로 사용한다. 이 8개의 비트는 총 256가지(2⁸)의 조합을 만들 수 있다. 바로 이 256개의 조합이 문자, 색, 소리, 영상 등 세상의 모든 정보를 디지털로 바꾸는 마법의 열쇠가 되는 셈이다.
컴퓨터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정보를 0과 1, 즉 켜짐(1)과 꺼짐(0)이라는 전기 신호의 흐름으로 해석한다. 컴퓨터 내부에서는 전기가 흐르는 신호는 ‘1’, 흐르지 않는 신호는 ‘0’으로 인식되며, 이 8개(예: 01000001)가 하나의 문자, 숫자, 기호를 나타낸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나 언어, 영상, 음악까지도 모두 0과 1의 조합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정보는 전기 신호의 흐름과 끊김으로 번역되어 컴퓨터가 이해하고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쇠라의 그림 속 색점 가운데 하나인 ‘따뜻한 벽돌색’이다. 컴퓨터는 빛의 삼 원소인 빨강, 초록, 파랑(Red, Green, Blue)을 조합해 색을 만든다. 각각의 색은 0부터 255까지, 총 256단계로 나뉘며 0은 가장 어두운 값, 255는 가장 밝은 값이다. 이 ‘따뜻한 벽돌색’은 빨강 213, 초록 102, 파랑 56으로 구성된 색이다. 컴퓨터는 이 색을 0과 1의 조합인 11010101 01100110 00111000이라는 숫자로 읽는다. 결국 색조차도 컴퓨터에는 꺼짐과 켜짐, 전기 신호의 조합일 뿐이다.
이어지는 아날로그의 느림과 쪼개진 디지털의 속도
스마트폰으로 석양을 찍는다고 해보자. 사람 눈에는 붉은 노을이 황홀하게 퍼지지만, 컴퓨터는 그 순간을 RGB 값으로 해석한다. ‘따뜻한 벽돌색’이라 불릴 만한 색은 빨강 213, 초록 102, 파랑 56으로 분해되고, 이건 다시 11010101 01100110 00111000이라는 0과 1의 행렬로 저장된다.
우리가 "와, 예쁘다"라고 말할 때, 컴퓨터는 "11010101!"이라고 반응하는 셈이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감탄하는 인간과 계산하는 기계, 그 사이에는 단순히 감성의 차이만 있는 걸까? 이제는 컴퓨터가 그 숫자들 안에서 아름다움을 배우고, 예술을 흉내 내는 시대다. 과연 이 숫자들이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숫자 속에 감정을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아날로그 세계의 연속된 흐름 속에 존재한다. 아침 햇살 아래 나뭇잎이 흔들리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울리며, 바닷가의 파도는 부드럽게 밀려왔다 밀려간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끊어짐 없이 흐르고 변한다. 연속적인 시간, 이어지는 감각, 부드러운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세상. 우리 삶 자체가 아날로그다.
하지만 컴퓨터는 연속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 오직 0과 1, 켜짐과 꺼짐, 두 가지 신호로만 세상을 받아들인다. 오늘날 디지털 세상에서 사물은 수천만 개의 픽셀 숫자로, 소리는 초당 수만 번의 진동 숫자로, 동작은 프레임 단위의 변화로 잘게 쪼개진다. 이렇게 쪼개진 정보는 모두 디지털 신호, 즉 0(전기 꺼짐)과 1(전기 켜짐)의 조합으로 변환된다.
컴퓨터는 0과 1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할 뿐이다.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도 빠르다는 데 있다. 1초에 수억 번 전원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기계의 능력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이제, 그 기계가 숫자 속에서 우리 감정의 그림자마저 읽으려 든다. 그 이름이 바로, AI다. 우리는 정말, 그들에게 마음을 들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