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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사라지는 것들

by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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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밤 홀로

동탄으로 이사한 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인천에서 숙박한다. 평소처럼 미리 숙소를 예약해 두었지만, 이번에는 착오가 있었다. 예약이 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연구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예전에 기숙사 게스트하우스에서 사용하던 이부자리가 연구실 한켠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 이부자리 덕분에 연구실의 밤을 무사히 견딜 수 있었다.


텅 빈 캠퍼스에 홀로 잠든 밤. 새벽이 되자 억수 같은 빗소리가 창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 빗방울 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어린 시절, 지붕 위로 내리던 빗소리가 떠올라 감상에 젖었다. 복도는 보안 때문인지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창을 통해 여린 불빛이 실루엣처럼 번진다. 깊은 잠은 어렵지만, 전혀 잠들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긴 소파에 이부자리를 펴고, 중간에 두세 번 잠에서 깼지만, 그 정도 불편함쯤은 이미 각오한 밤이었다.


밤에는 깨끗이 세수하고, 적신 수건으로 샤워를 대신했다. 아쉽긴 했지만, 그런대로 하룻밤을 견딜 만했다. 문제는 아침이다. 이른 시간부터 청소를 하시는 분들이 분주하게 오가기 시작한다. 그분들과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차를 몰고 나왔다. 미리 지도 앱으로 근처 사우나를 검색해 두었지만, 막상 가보니 몇 군데는 이미 문을 닫았고, 한 곳은 공사 중이었다. 동네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폐업한 곳이 많을 줄은 몰랐다.


낡은 간판, 옛 공간

한참을 헤매다 보니, <00사우나>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제법 세월이 있어 보이는 낡은 건물이다. 입구에는 여든은 훌쩍 넘어 보이는 듯한 할머니가 나른한 표정으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요금을 계산한 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미닫이 한옥식 문이 정겹게 느껴졌다. 문을 열자, 이발소 기계에 앉은 노년의 남자가 무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이발사이자 세신사 역할을 겸하고 있는 분이었다.


이름은 사우나지만, 실상은 오래된 동네 목욕탕이다. 적어도 30년은 되었을 테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군데군데 타일이 떨어져 나갈 듯한 낡은 시설이지만, 그런 게 무슨 대수인가.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온탕 하나가 있고, 그 옆으로 냉탕이 자리 잡고 있다. 자수정 사우나와 습식 사우나실도 나란히 붙어 있다. 열탕도 있었지만, 물 온도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손님이 드물다 보니, 열탕까지 제대로 가동하긴 어려운 모양이다.


습식 사우나실에 들어갔다가 금세 나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웠다. 문고리는 헐거워 샤워용 타월로 감아 겨우 고정했다. 잠시 숨을 돌린 뒤, 자수정 사우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문고리를 세게 당겨야 문이 제대로 닫혔다. 탕 안에는 나를 포함해 겨우 세 사람뿐. 한 사람은 막 샤워를 마친 뒤 물기를 털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수정 사우나실 안에서 느긋하게 땀을 빼고 있었다.


낡은 타일, 군데군데 떨어진 벽면, 닳아버린 세면기와 삐걱거리는 문을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어린 시절 동네 목욕탕의 기억은 없다. 대신, 한때 내 아이와 함께 다녔던 목욕탕 풍경이 아련히 떠올랐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땀을 식히던 시간,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등을 밀어주던 순간, 그리고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아버지들의 웃음소리. 지금은 그런 정겨운 풍경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잊히는 낡은 것들

낡은 것은 늘 외면받고 버려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반듯하고 최신 시설을 갖춘 대형 사우나를 찾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코로나 이후 발길이 뜸해졌고, 동네 목욕탕들의 형편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안타깝다.

그렇다고 사람들로 붐비는 물이 과연 더 깨끗할까? 오히려 이렇게 한적한 목욕탕의 물이 더 맑고 청량하게 느껴진다. 손님이 많지 않아 오염도 적고, 무엇보다 매일 새 물로 갈아낸다. 겉보기엔 낡고 초라하지만, 속은 오히려 더 깨끗할 수 있다. 삶도, 사람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낡은 목욕탕의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내 삶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 한때는 반들반들 윤기 나는 청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의 때가 겹겹이 묻은 몸이 되었고, 주름진 얼굴과 자주 피곤해지는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내 영혼이, 동네 목욕탕의 새 물처럼 맑아졌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매일 새 물로 자신을 정화하는 이 낡은 목욕탕이,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목욕탕도 한때는 날렵하고 윤기 나던 신축 건물이었을 것이다. 손님들로 북적였고,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하나둘 낡아졌고, 결국 쇠락해졌다. 이곳도 한때는 번듯한 상업 시설의 일부였지만, 많은 가게가 신도심으로 옮겨간 지 오래다. 단골손님들도 하나둘 떠나고, 이제는 누군가의 흐릿한 기억 속에만 머물고 있다. 그렇게 잊히고, 외면당한 채, 서서히 사라져간다.


결국 모두 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청춘의 피가 끓던 20대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10년이 지나면 30대가 되고, 또 그렇게 40대, 50대로 나이 들어간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누군가의 ‘과거’가 된다. 얼굴에는 주름이 지고, 마음은 조금씩 깊어지며, 몸은 서서히 낡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오래된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선 걸 알지 못하듯, 우리도 그렇게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이 작은 목욕탕도 언젠가는 헐릴 것이다. 그 자리에 화려한 새 건물이 들어설 테고, 입구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도 그때쯤이면 떠나고 없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질 그날, 과연 누가 이곳에서 느꼈던 고요한 위안과 따뜻했던 물살의 위로를 떠올릴까.


우리 삶도 이 목욕탕처럼, 언젠가는 문을 닫는다. 그러나 그 안에서의 시간만큼은 분명히 진짜였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삶의 무게를 씻어내던 순간들. 낡고 조용하지만, 그래서 더 깊이 스며들던 그 기억조차, 결국은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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