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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자화상

by Henry
비 오는 날의 자화상.jpg


종일,

추적추적 비 오고


부산스럽던 거리엔

오가는 발길 뜸해지자


세상도,

한결 조용해졌다.


회색 하늘,

짙은 먹구름 아래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한다.


잰걸음으로 걷는 이는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붉은 등이 켜지면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마음은

서러울 것 하나 없다.


물기 머금은 공기는 무겁고,

설핏 내린 비는

흙냄새를 짙게 풍긴다.


찬 물방울이 더운 공기를 밀어내

지내기는 한결 편해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헛헛하다.


연일 오르던 기온,

서서히 달아오르던 도시도

내리는 비에 흠뻑 젖는다.


자칫 기분이 가라앉는 이런 날,

막걸리에 파전이 생각나지만

잔 건넬 사람도 없고,

혼술은 당기지 않아

그저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랜다.


안타까운 건,

할 말은 목젖까지 차고 넘치지만,

글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게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니

누굴 원망하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빈약한 재주만 탓할 뿐,

서러움을 곱씹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람

먼 옛날, 중국의 학자 좌사(左思)


그도 처음부터

글을 잘 쓴 건 아니라고 말하지만,

끈기로 재주를 갈고 딲아

10년 만에 『삼도부(三都賦)』라는 명작을 완성했다.


그의 글이

처음엔 주목받지 못했지만

당대 최고 학자의 추천을 받으며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쇄술이 없던 시절이라

사람들은 너도나도 필사하려 애썼고,

그 바람에 수도 낙양의 종잇값이 폭등했다.


이후 사람들은

좋은 글이 나오면

"낙양의 종잇값이 오른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면 수백만 부가 팔리고,

수천만 조회 수를 넘겼을 그런 글이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진다.

그만큼 옹졸하다.


질투가 힘이라고 했지만

재주 없는 질투는

자기 마음만 다치게 한다.


어중간한 재능은 때로

재앙이고 독이다.


‘즐겨라“고들 말하지만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즐길 수 없다.


좋은 글

써리라는 다짐을 버리고

그날 느낀 느낌을

글로 남겨야겠다.


그저

하루를 정리할

좋은 일기장을 만났다.


글을 쓰고 싶을 때

언제든지 써 올릴 수 있는

그런 일기장


퇴고하지 않아도,

매끄럽지 않아도,

명문이 아니어도 괜찮다.

누가 탓할 사람도 없으니까.


온전한 아날로그 감성을

디지털 공간에 옮기는 작업


그것을 할 수 있는

나만의 디지털 일기장이 있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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