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기억은 잊혀도 추억은 남는다.

by Henry

거실에 앉아 있었다. 벽시계가 째깍거린다.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진다.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물든다.


오후 1시 20분. 카톡이 왔다. 친구의 부음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갈 곳 몰라 헤매던 그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다. 아직 갈 때가 한참이나 남았는데. 너무 일찍 먼 길을 떠났다.


놀란 가슴 추스르고 카톡을 접었다. 햇살은 여전히 비스듬하고, 시계는 여전히 째깍거린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 텅 비었다. 누군가 거실 한구석에서 소중한 가구를 조용히 들어낸 것 같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가난했다. 허기졌고, 방황했고, 길을 몰랐다. 사는 형편이야 거기서 거기였다. 다들 주머니가 헐렁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조금 달랐다. 일찍 집안 사업을 거들어서,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았다.


그는 늘 우리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위해 추렴을 아끼지 않았다. "괜찮아, 내가 낼게." 그 말을 얼마나 자주 들었던가.


그때는 몰랐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저 형편이 조금 나으니까 그래야 하는 줄 여겼다. 그만큼 철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그 시간이, 사실은 그의 너그러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동성로 샛길. 이름도 잊힌 다방이 있었다. 우리는 자주 그곳에서 만났다. 푼돈을 추렴해서, 커피를 시켰다. 설탕을 많이 넣어도 여전히 쓴 커피.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쓴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던 우리.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허무함은 안다. 스물 남짓의 나이로, 딱히 갈 곳 없이 다방에 앉아서, 시간을 흘려보내던 그 공허함.


오래 앉아 있으면 주인 눈치가 보였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막걸리 집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변변한 안주도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절의 허무는 안다. 공허는 기억한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모른다. 몇 월이었는지. 무슨 요일이었는지, 왜 만났는지. 모두 잊었다. 기억은 그렇게 흐려졌다.


하지만 그날 오후 1시의 햇살은 안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와서, 커피 위로 부서지던 가을빛을 추억한다. 그리고 저녁 무렵 술잔에 떨어지는 노을까지.


이상하다. 그때의 사실은 잊었는데, 느낌은 남았다. 문득 깨닫는다. 잊힌 것은 기억이고, 남은 것은 추억이라는 사실을.


기억(記憶)과 추억(追憶)은 한 글자 차이일 뿐인데, 그 사이엔 먼 세월이 흐른다. 기(記)억은 마음의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이지만, 추(追)억은 그 책장 위로 내려앉은 가을빛이다. 한쪽은 잊히려 하고, 다른 쪽은 잊히지 않으려 한다. 추억은 '기억의 그림자'가 아니라, 시간이 다녀간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기억과 추억, 그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얇지만 깊은 강. 건널 수 없는 강. 한쪽 강변에는 기억이 산다. 차갑고, 정확하고, 냉정하게. 다른 쪽 강변에는 추억이 산다. 따뜻하고, 흐릿하고, 다정하게. 우리는 평생 그 강을 오간다.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우리 뇌에는 두 개의 도서관이 있다고. 하나는 차가운 석조 건물이다. 높은 천장, 긴 복도, 빼곡한 서가들. 여기에 그해 가을, 동성로 다방, 커피를 마심. 객관적인 사실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도서관 사서처럼 정리된다.


시간이 지나면 책장이 낡는다. 페이지가 누렇게 바래고, 글자들이 하나둘 흐려진다. 이따금 쥐들이 종이를 갉아 먹는다. 비가 새면 잉크가 번진다. 마침내 읽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책이 있었다는 것, 한때 그 안에 무언가가 쓰여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그것이 기억의 도서관이다.


다른 하나는 따뜻한 미술관이다. 부드러운 조명, 나지막한 음악, 벽에 걸린 그림들. 여기에 그날의 비스듬한 햇살, 쓴 커피의 향, 친구의 웃음소리가 그림으로 그려진다. 물감으로 채색된다.


시간이 지나도 그림은 바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큐레이터가 날마다 찾아온다. 여기 색이 바랜 것 같다며 물감을 덧칠한다. 저기 빛이 약해진 것 같다며 조명을 새로 단다. 그렇게 매일 새로 그린다. 그래서 추억은 늙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착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기억이 왜곡되는 것이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추억이 거짓말을 한다 해도, 그 거짓말이 때로는 진실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을. 그날 햇살이 정말로 그렇게 비스듬했는지는 모른다. 커피가 정말로 그렇게 쓴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따뜻함만은 진짜다. 그 쓸쓸함만은 진짜다. 친구와 함께였다는 것만은 진짜다.


며칠 전 친구와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었다. 늘 씩씩하고 밝게 이야기하던 그 모습이 기억될 것이다. 몇 년 후, 그보다 더 시간이 흐르면, 나는 날짜를 잊을 것이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잊을 것이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관의 그림은 남는다. 비스듬한 햇살은 더 따뜻해질 것이고, 쓴 커피는 더 진해질 것이고, 친구의 웃음소리는 더 선명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는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서 함께할 것이다. 동성로 다방의 그 오후처럼, 비스듬한 햇살 아래에서, 쓴 커피를 마시며, 아무 말 없이 함께 앉아 있을 것이다. 스물 남짓의 젊은 모습으로, 주머니는 헐렁하지만 웃음만은 넉넉하게, 영원히 그 자리에서.


창밖을 본다. 나뭇잎들이 물들고 있다. 시계는 여전히 째깍거린다. 햇살은 여전히 비스듬하다. 이윽고 어둠이 내렸다. 사위가 막막하다. 세상이 멈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안다. 모든 순간이 언젠가는 추억이 된다는 것을. 가을날 오후의 햇살과 지금의 이 어둠도, 벽시계 소리도, 이 텅 빈 마음도, 언젠가는 미술관의 그림이 될 것이다.


친구는 떠났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내 안에서 날마다 새로 그려질 것이다. 더 따뜻하게, 더 선명하게, 더 다정하게.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는 방식이다. 기억은 사라져도, 추억은 붙잡는 것. 사실은 잊되, 온기는 간직하는 것.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설탕 없이. 쓰디쓴 첫 모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쓴맛. 하지만 뒤따라오는 은은한 깊은 맛. 그게 추억이다. 처음에는 쓰지만, 끝에는 달콤한 것.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가진 것. 떠났지만, 영원히 남은 것.


친구는 기억에서 사라져도, 추억 속에서는 영원하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 어딘가를 가을 햇살처럼 비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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