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사랑의 양자물리학

by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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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서 여자는 기쁨 아니면 슬픔

조지훈 시인은 그의 시 <사모> 중에서 "남자에게서 여자는 기쁨 아니면 슬픔"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이를 둘 중 하나로 정의한 것이다. 비트적 정의다. 0 아니면 1. 꺼짐 아니면 켜짐. 기쁨 아니면 슬픔.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는 "기쁨이면서 동시에 슬픔"이다. 그녀가 웃을 때 나도 웃지만, 동시에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이 행복이 언젠가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떠나 있을 때, 그리움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달콤하다. 사랑은 비트적이 아니라 양자적이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시인 김춘수는 그의 시 <꽃> 중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양자 세계도 놀랍도록 비슷하다. 측정하기 전까지 전자는 여러 위치에 동시에 존재한다. 확정된 위치가 없다. 그저 가능성의 구름일 뿐이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양자 중첩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측정하는 순간—전자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비로소 전자는 하나의 위치로 결정된다. 측정 전에는 "하나의 몸짓"이었지만, 측정 후에는 "꽃"이 되는 것이다.


관측이 실체를 만든다.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 스쳐 가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내게로 와서 우주가 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양자 도약이라고 부른다. 전자가 한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준위로 중간 과정 없이 순간 이동하는 현상. 첫눈에 반하는 것도 양자 도약이다. 어제의 타인이 오늘의 우주가 되는 순간, 우리는 양자 세계의 법칙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사랑의 부재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불합리함을 비판하기 위해 기묘한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상자 안에 고양이와 독극물이 있다. 양자 사건에 의해 독극물이 방출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험은 양자역학이 옳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 왔다. 측정하기 전까지 입자는 정말로 여러 상태에 동시에 존재한다.


연인이 멀리 떠나 있을 때, 우리는 궁금해한다. 그 사람은 지금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닐까?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연락이 오기 전까지 그 사람은 "나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생각하지 않는다." 카톡 알림이 울리는 순간,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의 중첩 상태는 붕괴한다.


밤늦은 시간, 핸드폰을 바라본다. 메시지가 올까, 안 올까. 핸드폰을 확인하기 전까지 메시지는 와 있으면서 동시에 와 있지 않다. 손가락이 화면에 닿는 순간, 양자 세계는 하나의 현실로 수렴한다.


으스스한 원격작용

물리학자들은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을 발견했다. 하나의 입자 상태를 측정하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입자도 즉시 반응한다. 빛보다 빠른 정보 전달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아인슈타인은 이를 "으스스한 원격작용"이라며 거부했다. 하지만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은 바로 이 양자 얽힘을 실험으로 증명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우주는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기묘하다.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아플 때, 나도 모르게 불안해진다. 특별한 연락이 없어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한쪽이 기뻐하면 다른 쪽도 웃는다.


과학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말할 것이다. 측정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양자 세계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안다면, 사랑의 얽힘도 그저 미신이라고만 할 수 없지 않을까. 우주가 원자 단위에서 이토록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다면, 의식과 감정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측정의 폭력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슬픈 진실은 "관측이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려 할수록, 전자의 운동량은 불확실해진다.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 둘 다를 동시에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다.


측정 행위 자체가 대상을 교란한다. 전자의 위치를 보려면 빛을 쏘아야 하는데, 그 빛이 전자를 밀어낸다. 그래서 완벽한 관측은 불가능하다. 알려고 측정을 시도하는 순간, 대상은 변한다.


사랑도 그렇다. "지금 나를 사랑해?"라고 물어보는 순간, 그 질문 이전의 순수한 감정은 이미 변한다. 사랑을 측정하려는 행위가 측정 대상인 연인의 마음을 교란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자주 확인하려 들면, 사랑은 무너진다.


연인의 핸드폰을 몰래 확인하는 사람은 안심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신뢰는 파괴된다. 측정의 폭력이다. 완벽하게 알려고 할수록, 사랑은 더 불확실해진다.


중첩 상태로 존재하기

양자 세계의 입자들은 측정하기 전까지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이것이 자연의 본성이다. 인간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우리는 명확한 답을 원한다. 0 아니면 1. 삶 아니면 죽음. 사랑 아니면 결별.


하지만 실제 세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전자는 여러 곳에 동시에 있고, 사랑하는 이는 기쁨이면서 동시에 슬픔이다. 행복하면서 불안하고, 확신하면서 의심한다.


측정하지 않고 믿는 것. 완벽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중첩 상태를 인정하는 것. 양자 세계와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같다.


조지훈 시인은 여자를 비트로 정의했지만, 나는 양자로 정의한다. 기쁨이면서 슬픔. 있으면서 없음. 확실하면서 불확실함. 이 모순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된다.


양자 세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리고 사랑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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