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기다렸어
일 년 내 오늘을 기다렸어. 가을이 아름다운 무의도(舞衣島)로 오는 이날을. '(선녀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춤추는 섬'이라 해서 무의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어. 섬의 맵시가 얼마나 날렵하면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섬은 원색의 옷을 입고 화려한 춤사위를 벌이고 있어.
마지막 한 잎마저 떨군 나무는 죽음 같은 침묵으로 한겨울을 견뎠어. 봄날 새순 돋고 가지는 연두색 생명을 키웠어. 뜨거운 한여름의 햇살은 초록 잎의 세상을 만들었지. 그렇게 풍성하던 여름 한 철이 끝나고 기어이 천연색의 잔치를 벌이는 가을이 온 거야. 지난가을 보내고 오늘까지, 나는 오직 이 하루를 기다린 거야.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라는 영화가 있어. 그 실미도에 물이 빠지면 무의도에서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붙어 있어. 그렇게 이야기하면 무의도라는 이름이 한결 가깝게 느껴질 거야.
인천공항에서 20분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있는 무의도가 있어. 옛날에는 무의도 가려면 5분도 걸리지 않은 바다를 건너야 했어. 그때는 잠진도 선착장에서 배를 띄워 이내 무의도 큰무리 선착장에 도착했지. 지금은 섬과 섬이 다리로 이어져 하나개 주차장까지 내처 차로 달릴 수 있어.
그래서일까? 아침부터 차들이 줄지어 섬으로 왔어. 몇 군데나 되는 하나개 해수욕장 주차장에는 이미 차들이 가득해. 족히 수백 대가 넘는 차에서 사람들이 내렸어. 이제는 섬이 아니라 뭍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 막상 산에 들어서니 사람 그림자가 거의 보이지 참 좋아.
무의도에는 호롱곡산(245.6m)과 국사봉(236m)의 두 개의 산이 있어. 둘 다 그리 높지 않은 둘 다 올라도 금방이고, 한 군데만 올라도 농익은 가을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어. 섬에는 ‘하나밖에 없는 큰 갯벌’이라는 이름의 하나개 해수욕장이 있고, 바다를 끼고 있는 나무 계단을 걷는 재미도 일품이야.
산길 양옆으로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어. 마치 바다를 가르며 산을 오르는 기분이야. 국사봉은 가을나뭇잎으로 도배했어. 해풍은 나뭇잎만 흔들지 않고, 얄밉게도 내 마음도 흔들어.
11시가 조금 못 미쳐 호롱곡산 정상에 올랐어.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 지 오래라, 햇빛에 몸을 말린 해무는 바삐 사라졌어. 바다는 에메랄드빛 본색을 드러내고, 가을 산 그림자는 파도에 일렁이고 있어. 신갈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그리고 굴참나무가 호랑곡산의 주종이야. 그래서 산은 빨간색보다 노란색과 갈색으로 물들었어.
산 꼭대기에 올라 서해의 풍광을 바라보는 일은 아름답다 못해 말 그대로 몽환적이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고 말았어. 고독은 감미롭고 외로움마저 황홀해지는 가을날이야.
어질고, 지혜로운 시간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어.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 이곳에 서면 누구나 어진 사람도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거야. 이 순간만은 그렇다는 말이지.
정오로 가는 해는 무의도 바다에 오렌지색 햇살을 뿌리고, 바람은 부드럽게 내 뺨을 어루만져. 섬 앞 갯바위에 부딪힌 파도는 파란 멍울을 하얀 포말로 흩뿌리고 있어. 더디게 흐르는 시간 너머로 해는 조금씩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는 영근 가을 햇살에 젖은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어.
산꼭대기에서 듣는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의 애잔한 선율에 참나무 잎들도 귀 기울이고 있어.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율은 해풍에 실려 가을 공간으로 퍼지고, 내 마음도 가을 색으로 물들고 있어. 가을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먼 이국의 하늘을 배회하고, 늘 그렇듯 바다에만 오면 쓸쓸한 '에뜨랑제’가 되곤 해.
좀 있다 하산하는 길에 다시 국사봉을 올라야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오후가 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내가 떠나고 나면, 산 그림자는 저녁노을을 데리고
해변가 마을로 내려갈 거야. 길 떠날 이의 마음이 분주해지고, 아쉬움을 남기고 회색의 빌딩 숲으로 돌아가야 해. 아름다운 무의도의 핏빛 낙조를 뒤로 떠날 수밖에 없어.
가을이 깊은 오늘,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 섬이 왔어. 이곳에만 오면, 나는 인지하면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어 좋아. 까무러치게 예쁜 가을 한나절의 풍경, 머무름은 짧아도 감동은 길고, 여운은 오래 남을 거야. 오늘이 가면, 나는 또 긴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만 해. 내년 가을, 다시 오늘이 오길 그렇게 애타게 기다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