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시간이나 일찍
예정 시간보다 무려 다섯 시간이나 빨리 포항에 도착했어. 오후 2시 이곳에서 중요한 회의가 잡혔어. 밤과 낮이 자리를 바꾸는 6시 42분,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남쪽으로 달렸어. 포항역에 도착하니 오전 9시 8분.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어.
뭘 착각했냐고? 아니, 일부러 그렇게 계획한 거야. 10월의 동해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기에 일찍 왔지. 포항역에서 버스를 타고 흥해읍의 버스 환승센터로 갔어. 그곳에서 마을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불과 2분 전에 버스가 떠났어. 1시간 더 지나야 다음 버스가 온다고 해. 시골 버스의 낭만을 뒤로하고 택시를 타고, 가을의 칠포에 도착했어.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해. 철 지난 바다는 쓸쓸함과 아쉬움, 그리고 아련함이 있어 좋아. 이른 아침을 시작한 덕분에 오전 11시가 되지 않아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에 있어. 풍경이 예쁜 카페에서 향이 좋은 커피를 홀짝이며 이 글을 쓰는 거야.
고개를 들면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인디고 블루와 황금빛 비늘로 빛나는 물결이 보여. 해변의 가로수는 단풍으로 곱게 단장했어. 가을 색의 찬미라고나 할까. 이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런 황홀한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이만한 낭만이면 졸음을 물리치고 부산스레 달려온 대가치고 모자람이 없어.
시간이 난다? 시간을 낸다?
여행을 마칠 때면 늘 아쉬움에 다시 오마는 허튼 약속을 하지.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그걸 속절없이 만든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이번에는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어. 그런 다짐으로 시간이 나서가 아니라 시간을 내서 온 거야.
누군가 만나자고 할 때, 마침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이 없으면 시간이 난다고 말하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 해야 할 때는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그런데 그 일을 할 일을 잠시 밀치고 약속을 잡는다면, 그럴 때는 시간을 낸다고 말하지.
본디 시간이란 놈의 실체가 없어. 다만 일이 있고, 없는지에 따라 우리가 그렇게 대처할 뿐이지. 세상을 살면서 미루면 난리가 날 일을 얼마나 많을까? 마음이 바쁘고, 몸이 피곤해서, 혹은 나가기 귀찮아서,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없을까? 진짜 없어서가 아니라 핑계를 만들 때도 많다고 봐야지.
사는 게 뭐 그리 심각할까. 시간이 나지 않아도 낼 수 있는 것이 인생이야. 다섯 시간이나 일찍 서둘러 이곳에 온 까닭은 오늘이 아니면 다시 못 볼 가을 바다 때문이야. 카페 창을 통해 바다를 보니 시간 내길 잘했어. 평범한 일상 속의 소박한 일탈, 늘 꿈만 꾸다 드디어 실천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