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층

by Henry


낡은 풍경의 냄새를 맡는 순간, M은 곧장 알았다. 여기가 그때, 그곳이라는 것을. M은 순식간에 그해 가을로 돌아갔다. 이미 잊었노라고, 하마 잊었노라고 생각했던 원초적 아픔과 설렘이 뒤섞여 되살아났다. 바로 그 장소, 그 공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공간은 흐르는 시간을 묶어둔다. 탄소를 품은 공간이 수억 년의 시간을 땅속 깊이 가둬두었듯, 찬란히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공간 속에 체화된 시간의 지층이다. 건물의 벽은 골목의 습기와 바람의 흐름을 켜켜이 쌓아 놓았다. 그것은 일상 속 시간의 지층이었다.


M은 깨달았다. 자신이 혼자 힘으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길모퉁이 골목길은 그해 가을을 불러냈고, 그해 가을은 M을 다시 <약속> 카페로 데려왔다. 공간과 시간, 이 둘은 M의 기억 여행의 원동력이다.


안타깝게도 언제 다시 만나자던 약속이 없었듯이 <약속> 카페는 사라졌다. 낯선 간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약속>은 언제 문을 닫았을까? 이제 M이 아니고서야 이 공간과 이름을 누가 기억해 줄까? 흔적은 지워지고, 낡고 색이 바랜 건물만이 그곳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덧칠을 했을까? 자취는 건물 외벽에 고스란히 남았다. 거듭 칠한 페인트가 층층이 다른 색을 드러내었다. 크림색, 연두색, 하늘색, 그리고 회색이 지질학적 단층을 이룬다. M은 나무의 나이테를 세듯, 손끝으로 그 색깔의 겹을 천천히 헤아린다.


많은 가을과 겨울이 이 벽을 스쳐 지나갔으리라. 억센 비와 거친 바람이 간판을 바래게 하고 벽에는 깊은 생채기를 냈다. 그때마다, 밝고 투명했던 <약속>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급기야 덧칠한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갈색 나무 속살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M의 뇌리에 그해 가을의 느낌은 여전히 투명하고, 그때의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M은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던 오후 햇살을 떠올렸다. 그날 M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공간과 시간도 움직임을 멈춘 채 함께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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