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시간 팽창
잠을 설쳤다. 이제 곧 동이 틀 것이다. 이제 글 쓰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우리는 사유에도 질량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플라톤, 칸트 같은 거대한 사상가들의 생각은 마치 무거운 천체처럼 주변의 모든 사유를 휘게 만든다.
그렇다면 시간 팽창은 어떨까? 블랙홀 근처에서 1시간이 지구의 수백 년이 될 수 있다면, 사유의 세계에도 이런 현상이 있지 않을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고, 한 페이지를 읽는 데 30분이 걸리기도 한다. 사유의 밀도가 높은 부분에서는 시간이 느려진다.
반대로 가벼운 글은 빠르게 지나간다. 뉴스 기사, SNS 피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사유의 질량이 작아서 시간을 늘릴 수 없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 문장 앞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신은 죽었다." 이 네 글자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사유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그 안에서 시간이 거의 멈춘다. 이것이 사유의 시간 팽창이다.
사유의 블랙홀
그렇다면 사유의 블랙홀도 있을까?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사유의 밀도가 너무 높으면 창조성이 떨어질 수 있다. 위대한 성인의 사유가 너무 무거우면, 오히려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틈을 막아버린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너무 무거워서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없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 기존의 사유 체계가 너무 견고하면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중세 스콜라 철학을 생각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신학이 만든 거대한 사유 체계. 그 질량이 너무 커서 모든 사유를 빨아들였다. 천 년 동안 유럽의 모든 지식인은 이 중력장 안에 갇혀 있었다.
새로운 생각은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밀려났다. 무한우주론을 주장한 브루노는 화형당했고, 지동설을 증명한 갈릴레오는 침묵해야 했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종종 젊은 과학자들에 의해 일어난다. 기존 이론의 질량에 포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것은 26세 때였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한 것은 25세 때였다. 그들은 아직 기존 패러다임의 중력장에 완전히 포획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탈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사유의 최적 밀도가 있을 것이다. 너무 성기면 깊이가 없다. 너무 조밀하면 경직된다. 딱 적절한 밀도에서 창조성이 폭발한다. 과학의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집단 사유의 중력
개인의 사유만 질량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집단의 사유도 질량을 가진다. 한 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거대한 중력장을 만든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관, 19세기의 뉴턴 역학, 20세기의 진화론. 이런 거대 패러다임은 모든 사유를 자기 쪽으로 휜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다. 사실은 거대한 생각의 중력장 안에 포획되어 있을 뿐이다. 마치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의 중력에 묶여 있듯이, 사람들의 생각이 고정된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은 이 중력장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탈출 속도(escape velocity)가 있듯이, 사유에도 탈출 속도가 필요하다. 충분히 빠르고 강한 새로운 사유만이 기존 패러다임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천 년 된 천동설의 중력장을 벗어났다. 다윈의 진화론은 창조론의 중력장을 벗어났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턴 역학의 중력장을 벗어났다. 이것은 기존 패러다임을 탈출한 사유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더 큰 궤도를 그릴뿐이다. 코페르니쿠스도 여전히 원 궤도를 믿었다.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중력장 안에 있다.
사유와 사건의 지평선
블랙홀에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마지막 지점이다. 사유에도 사건의 지평선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마지막 경계 말이다.
20세기의 뛰어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언어가 도달한 사건의 지평선이다. 그 너머는 침묵의 영역이다.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고 했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 사유의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선불교의 화두도 마찬가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논리의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려는 시도다. 그 너머에서 깨달음이 일어난다.
우리의 사유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아는 것, 사건의 지평선이 어디인지 아는 것, 그것이 지혜와 깨달음의 시작이다.
당신의 사유는 얼마나 무거운가?
물리학의 중력 이론을 사유에 적용하는 것은 억지나 꿰맞추기가 아니다. 오히려 확장이다. 물질과 정신, 물리와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기야 어느 쪽이든 대가들이 들으면 심기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깊은 사유는 정말로 무겁다. 물리적으로도, 은유적으로도. 그 무게가 다른 사유를 끌어당긴다. 사유의 공간을 휘게 만든다. 사유의 시간을 느리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유의 상대성 이론"이다. 모든 사유는 상대적이다. 하지만 사유의 질량은 실재한다. 그 질량이 만든 중력장 안에서 나는 생각한다.
물리학은 먼 우주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생각에도 질량이 있다.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의 사유가 무거워진다. 당신이 읽는 책, 당신이 나누는 대화, 당신이 쓰는 글. 이 모든 것이 사유의 질량을 키운다. 가벼운 생각만 하면 당신의 중력은 약하다. 누구도 당신의 생각에 이끌리지 않는다.
하지만 깊이 사유하면 다르다. 당신 주변의 사유 공간이 조금씩 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인다. 당신의 글이 누군가의 생각을 바꾼다. 당신의 존재가 무게를 가진다.
블랙홀 근처에 1시간 머물면 지구에서는 수백 년이 흐른다고 했다. 깊은 사유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한 권의 책을 깊이 읽는 1년은, 피상적으로 사는 사람의 10년보다 무겁다. 시간의 양이 아니라 밀도가 중요하다.
이것이 사유의 중력이다. 깊이 생각하라. 세상이 당신 쪽으로 조금 휘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