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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Nov 07. 2022

도약은 불연속적이고 비약적이다.

'문명의 불연속적 도약' 필자가 개인적으로 정리한 그림


도약은 늘 불연속적이고 비약적이다.

산을 오르고자 한다면 산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흐름이 끊기지 않고 산꼭대기까지 발걸음이 이어진다. 숨이 가빠 중간에 잠시 쉬어간다고 해도 발자국의 흐름은 끊기지 않는다. 산을 오를 때처럼 길을 걸을 때도 발걸음이 끊기지 않는다. 이러한 연속적인 움직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질서이다.


산비탈을 따라 오르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평지를 걷다가 점프해서 수직으로 산을 오른다면 어떨까? 충분한 에너지를 비축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점프해서 산을 오르는 방법 말이다. 이렇게 점프해서 산을 오르면 발걸음이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치 높은 계단을 풀쩍 뛰어오르는 모양새다. 이런 움직임은 순간적인 도약으로 불연속적 흐름이다.


산을 도약하듯이 불연속적으로 오를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연속적이고 확정적이다.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세상이 있을까? 놀랍게도 그런 세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불연속적으로 도약하는 곳이 있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상이다. 인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근원인 원자의 세상에서는 연속적이고 확정적인 것은 없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이루어졌다. 전자는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하고 불연속으로 움직임 인다. 전자가 어디 있는지 확정할 수 없고, 확률적으로만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개뼈다귀 같은 소리로 들린다. 그렇지만 양자물리학은 미시의 세계가 불연속이고 불확정적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했지만, 미시의 세계는 양자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 받아들여졌다. 세상은 연속적이고 확정적인 거시 세계와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미시 세계로 이루어졌다.


양자물리학이 말하는 미시의 세계는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과 의식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들은 물리적 실체도 아니라서 애초 눈에 보일 리 없다. 물질과 개념의 차이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같다. 그렇다면 생각과 의식도 불연속적으로 도약한다고 보면 어떨까? 본질이 다른 대상을 동일한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억지일 수 있다. 다만,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주면 감사할 일이다.


인류의 문명도 불연속적으로 도약해왔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별다른 기복 없이 꾸준히 발전을 거듭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오랜 시간 동안 다져진 기술이 어느 한순간에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형태를 보여왔다.


약 6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의 조상과 결별하였다. 그로부터 무려 580만 년의 시간이 지나 우리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이 땅에 출현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0만 년 전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추론하고 생각하고 인지 능력을 갖춘 시기는 대략 7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 사이에 일어났다. 10만 년 이상의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인간의 지적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것을 혹자는 인지 혁명이라 부른다. 그 후로도 인간은 농업혁명, 제국의 건설, 화폐의 발명 등 수많은 지적 도약을 경험했다. 모두 중간에 휴지기가 있는 불연속적인 도약이다.


도약과 도약의 중간에는 최소 몇 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인류는 지식을 마치 포탄 속의 화약처럼 차곡차곡 쟁였다가 어느 한순간 폭발시켰다. 긴 기다림 끝에 지적 도약을 일으켰다. 인간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더 지적 도약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도약과 도약 사이의 시간적 간극이 점차 짧아졌다. 기술의 발달은 다음 기술의 출현 속도를 줄여주는 특징을 보여준다.


인류 문명의 등뼈 '축의 시대'

기원전 700년~200년 전후를 인류 문명의 축이라 한다. 지금 우리가 아는 철학과 과학의 기초 지식이 대부분 이 시기에 출현했다. 철학, 과학, 종교 등 오늘날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사상이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이 분출한 것이 바로 이때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인류 문명의 등뼈라며, '축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카렌 암스트롱은 저서 『축의 시대』에서 이 시기가 인간 창조성이 가장 뜨겁게 폭발했던 경이로운 시대라고 감탄한다.


곰곰이 따져보자.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동시에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야, 맹자,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등 위대한 사상가와 천재들이 탄생했다. 이들이 뿌린 지식의 씨앗이 동서양의 과학과 철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과학과 철학이 이들이 뿌린 씨앗이 꽃피운 것이다.


그 후 인류 역사는 르네상스가 도래할 때까지 눈에 띌 만한 비약적인 도약을 보이지 않는다. 중세는 도약을 이끌 에너지를 비축했다. 중세 말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축적한 경제력으로 문화와 과학 그리고 예술 분야의 천재들을 후원했다. 이들의 지적 성과물은 르네상스를 열었고, 자연 과학의 문을 활짝 열었다. 축적된 자본은 기어이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인류는 지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이 도약하면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했다.


도약의 간격이 짧아진다.

1700년대 말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류의 경제 수준을 수직으로 도약시켰다. 그 결과 중세의 봉건주의 산업구조는 뿌리째 흔들렸다. 증기기관은 자동으로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만들었다. 증기를 동력원으로 해 기계를 돌리는 내연기관의 발명은 세상을 완전히 뒤집었다. 중세 천 년을 기다렸던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그 후로 연이어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공정 자동화 시스템 혁명, 1980년대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정보혁명이 뒤를 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바이오 혁명 등을 묶은 기술의 변화를 4차 산업혁명이라고 말한다. 조만간 인간과 같이 생각하는 인공지능(AI)의 등장을 예상한다. 인간을 능가하는 초지능의 출현 시점인 특이점(Singularity)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처럼 인류의 기술 진보는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기술 진보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사이클은 더 짧아지고 있다. 기술이 발명하면 그다음 기술의 발명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 단축된다. 기술은 수확체증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기술이 인간과 대등한 수준을 갖춘 강한 AI 발명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만일 강한 AI가 발명되면 그다음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지능의 발명은 시간문제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예견되는 도약도 불연속적이고 비약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술은 인간의 의식도 양자 도약(quantumn jump)을 할 것이다. 비단 기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식도 양자 도약을 한다. 다만, 공부하고 학습하고 오랫동안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 도약의 디딤돌이 없다면 어찌 높이 오를 수 없다. 지금도 많은 천재가 인류의 미래를 밝히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그들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아득한 지식의 수평선을 바라본다.


안갯속을 걷는다.

나는 여전히 몽롱하고 안갯속을 거닌다. 저기 어디쯤 깨침이 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다. 이 길인가 싶어 가보면 아니고, 저 길인가 싶어서 가보면 또 아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정글을 혼자 헤매기를 어언 몇 년인가?


여전히 정확한 방향을 잡지 못해서 방황하는 신세다. 이 길 저 길 하도 다녔더니 저 멀리서 아주 희미한 불빛이 비친다. 막상 가보면 역시 깊은 숲속의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형편이 나아졌노라고 자신을 다독인다. 다행인 것은 하나를 알 때마다 즐거움도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나름 책을 본다고 하나 여전히 공부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린다.  지식의 숲은 애초부터 벗어날 수 없는 광대한 땅이다. 어떤 분야든 전공하고서도 짧게는 수년에서 수십을 한결같이 정진하는 전문가들이 들로 넘쳐난다. 그러니 내가 지금도 방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배우고 익히는 건 좋은 일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고 깨달을 때마다 기쁨이 솟는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 책을 읽고 공부한다. 옛 선비들은 퇴촌하여 책과 수묵화를 벗삼았다. 그런 그들의 형편과 여유가 부럽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히 공자의 공부하는 기쁨을 논할 계제가 아니다.


하릴없이 세월 보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슨 공부든 목표가 있는 공부는 힘들다. 처음부터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건 아닐까. 만족을 모르는 우매함은 자신을 끊임없이 방황의 질곡 속으로 밀어 넣는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비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삶이 원래 그러하거늘 무얼 원망할까? 새삼 대가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곱씹어 본다.


언제쯤이면 내 지식도 양자 도약을 할까. 그때까지 지식의 화약을 쟁여 놓을 수는 있을까. 늘 욕심은 앞서고 마음은 바쁘다. 이 대목에서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양질전환의 법칙'을 새겨야 한다. 일정한 양이 누적되면 어느 순간 질적인 비약이 일어난다. 물의 끓는 온도가 100도에 도달해야 액체에서 수증기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이치다. 생각과 의식이 질적으로 도약하려면 임계치에 도달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도약은 비약적이고 불연속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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