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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Nov 08. 2022

무의도의 가을과 서해의 낙조(落照)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공자는『논어(論語)』 '옹야(雍也)' 편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는 유명한 문장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혜롭고, 산을 좋아하는 인자할까?


산은 묵묵히 제자리에 서 있다. 산은 조용하고 정적(靜的)이다. 그런 고요함으로 오는 사람을 마다치 않고 넉넉히 품어준다. 지치고 힘든 사람은 산을 찾는다. 어진 사람도 산처럼 조용하고 말이 없다. 마음 넉넉하게 사람을 위안해주고 안아준다. 어진 사람은 산을 닮아서 산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쉼 없이 흐른다. 물은 활발하고 동적(動的)이다. 물은 바위가 있으면 돌아갈 줄 알고, 차면 넘치는 지혜를 가졌다. 지혜는 나날이 발전하고, 깊어진다. 깨달음이 높아질수록 지혜도 높아진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과 같이 쉼 없이 넓은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간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과 같아 물을 좋아하는가 보다. 


산은 정적(靜的)이지만, 산을 오르는 일은 동적(動的)이다. 내처 앞만 보고 오른다. 어느새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아무 생각이 없다. 빨리 산꼭대기에 오르고 싶은 마음뿐이다. 힘에 부칠 때쯤이면 정상에 도착한다. 산꼭대기에 서면 세상이 발아래 있다. 정복감이랄까? 뭐라도 단박에 해 낼 것 같은 용기가 솟는다. 산에 가면 힘이 생기고 희망이 그려진다.  


강가나 바닷가에 가면 힘쓸 일 없다. 흐르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본다. 바닷가에 서면 천천히 백사장을 거닐거나 먼 수평선을 본다. 강가나 바닷가에 서면 우리는 느긋해지고 정적(靜的)이 된다. 파도는 밀려왔다가 밀려가고 강물은 흘러가지만, 우리는 말없이 관조한다. 그래서일까 바닷가나 강가에 서면 자꾸 추억이 밀려온다.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 깨져버린 옛사랑이 떠오른다. 


서해의 낙조(落照)

무의도

인천공항에서 20분도 채 되지 않는 곳에 무의도(舞衣島)라는 섬이 있다. ‘옷 입고 춤추는 모습’이라 해서 무의(舞衣)라는 섬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이 말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의’가 우리말 ‘무리’나 ‘물’을 한자로 표시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뜻 없이 소리만 따서 붙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몇 해 전 무의도에 갔다. 잠진도 선착장에서 뱃머리를 틀자 이내 무의도 큰무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때는 겨우 5분 거리지만, 바닷길이라 배를 타야 했다. 섬에는 호룡곡산(245.6m)과 국사봉(236m)의 두 개의 산이 있다. 둘 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차례로 올라도 좋고, 한 군데만 올라도 가을의 정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무의도에는 ‘하나밖에 없는 큰 갯벌’이라는 이름의 하나개해수욕장이 있다. 오래전에 ‘천국의 계단’이라는 드라마의 촬영지로 한때 인기가 높았다. 무의도는 바닷길로 실미도와 이어졌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실미도 사건’의 실제 장소다. 영화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그날은 오전 내내 젖은 안개가 자욱했다. 섬은 안개 천국이었다. 한낮 햇살이 비치고, 몸을 말린 안개는 바삐 사라졌다. 그제야 바다는 에메랄드빛 본색을 드러냈다. 형형색색의 가을 산과 파란 바다가 빚은 풍경에 넋을 잃었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에게해의 쪽빛 바다가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무의도의 풍경이다.


국사봉에 올랐다. 산을 오르는 길 양옆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마치 바다를 가르며 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국사봉은 색색의 나뭇잎으로 도배했다. 해풍은 나뭇잎을 흔들고, 무의도의 가을은 깊어간다. 국사봉 꼭대기에 올라 늦은 오후 서해의 낙조를 보는 일은 아름답다 못해 말 그대로 몽환적이다. 고독은 감미롭고 외로움까지 황홀한 가을날이다. 


가을 해는 먼 길 달려와 붉은 햇살을 뿌린다. 바다 위로 서서히 붉은색 물감이 퍼진다. 바람은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진다. 바위에 부딪혀 깨진 파도는 포말로 흩어진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 너머로 해는 서서히 수평선으로 빨려든다. 끝 간 데 없이 아득한 수평선까지 핏빛 물감이 번졌다. 노을은 영근 가을 햇살을 적시고, 섬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고즈넉하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듣는다. 애잔한 선율에 나뭇잎도 귀 기울인다. 온다 간다 말없이 시간은 어둠 속으로 숨는다. 선율은 해풍에 실려 가을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먼 이국의 하늘을 배회한다. 입가엔 '에뜨랑제’의 쓸쓸한 미소가 맴돈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산 그림자 내려앉으면 길 떠날 이의 마음이 분주해진다. 아쉬움을 남기고 회색의 빌딩 숲으로 돌아왔다. 서해의 낙조가 그리 아름다운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런 소중한 추억 하나를 건지고 왔다.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 섬이 그곳에 있다. 그 섬에서 나는 인지하면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됐다. 가을 한나절 산을 좋아하는 인자함과 물을 좋아하는 지혜를 다 가져 봤다. 감동은 짧고 방황은 길다. 그래도 그 섬의 가을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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