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이단아 이탁오와 미완의 혁명가 체 게바라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다. 남들이 왜 짖느냐고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오호라! 나는 오늘에서야 우리 공자를 이해했고 더 이상 예전처럼 따라 짖지는 않게 되었다. 예전의 난쟁이가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인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의 원색적이며 통렬한 자기비판이다. 이탁오(李卓吾) 혹은 이지(李贄)라는 이름 앞에는 늘 ‘중국 사상계의 이단아’, ‘명대 최고의 사상적 반항아’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당대의 질서를 지배한 공자와 주희를 비판했다. 그는 노자와 장자, 불교를 중시하고 신분 차별을 부정하고 남녀평등, 자유주의 정신과 개인 행복론을 주장했다.
이탁오는 50세 이전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한 마리 개에 빗댔다. 그는 공자와 유교의 본질을 정확하게 모르고, 그저 껍데기만 알고 숭배했다고 자신을 비판했다. 명나라와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자와 맹자의 말과 글을 과거급제용 출세 학문으로 이용했다. 관리가 되기 위해서 공자와 맹자, 주자의 경전을 달달 외워야 했다. 어느새 공자와 맹자가 말한 본질은 어디로 사라지고,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는 논리로 공자와 맹자를 이용했다.
이탁오는 출세의 수단으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이용하는 유학자들을 맹비난했다. 그는 소위 학자들이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공맹 논쟁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당시 명나라와 조선의 조정에서는 연일 공자와 맹자의 법도가 옳으니 그런지를 따지며 시끌벅적했다. 그렇다고 해도, 서슬 퍼런 유교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은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살벌한 일이다.
이탁오는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각자의 쓰임새를 주었고, 공자가 인정해야 그 사람의 존재가치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만약 반드시 공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공자가 없었던 옛날에는 결국 재대로 된 사람이 없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유학은 세상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분란만 일으킨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스스로 유식하다고 자부하는 유학자들은 사실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무식꾼들이나 마찬가지라고 깎아내렸다.
이탁오는 공자와 유교 사상을 뿌리째 비판했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성리학과 성리학자들의 가식적인 면을 경멸했다. 그는 공자를 팔아 먹고사는 유학자ㆍ사대부ㆍ관료집단을 안 그런 척하면서도 재물을 탐내고, 학문이 깊은 척하나 행실은 개돼지와 다를 바 없다고 맹비난했다. 그의 비판은 원색적이고 인식 모독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했다. 유교를 통치 원리로 삼고 공자와 맹자를 숭상하던 명나라와 조선으로 봐서 이탁오는 유교의 반역자이자 타도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이탁오는 명나라의 재상들을 환관에게 아첨하고 굴종하는 ‘환관의 노예’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기존 질서에 거세게 저항했다. 당시 모순투성이의 명대 사회에서 혁명적인 지식인으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자연히 명나라 권력층과 유학자들이 눈 밖에 난 그는 불온한 사상가로 낙인찍혔다. 부패한 지배층의 탄압으로 체포된 그는 된 그는 76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일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옥중에서도 평상시처럼 책을 읽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는 말을 남기고는 세상을 하직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스스로 선택하는 시대의 반항아였다. 그는 온몸으로 불합리한 시대와 맞섰던 이단아였다.
이탁오가 꿈꾸던 세상은 공자와 맹자의 권위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자유롭게 사는 세상을 꿈꿨다. 남녀의 차별 없이 같이 공부하고 대우받는 평등한 세상을 주장했다. 대단히 파격적이고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과격했고 논리적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그의 주장과 학설은 공자나 주자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체계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것이 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탁오의 사상을 이어받은 조선의 학자로는 허균과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그들 또한 백성들이 잘사는 나라를 꿈꾸던 개혁가들이었다. 그들 또한 조선의 지배층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가 더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이탁오와 허균 그리고 정약용은 그런 엄혹한 시절을 살다 갔다. 그들의 개혁적인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와 실현되고 있다.
미완의 혁명가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1959년 1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최고 권력에 오른 카스트로는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고 농민에게 몰수 토지를 무상 배분하는 농지 개혁을 단행했다. 쿠바의 권력층을 좌지우지하던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카스트로는 젊은 변호사로 부패 정권에 맞서 혁명가가 되었다. 그는 혁명에 성공한 후 49년 동안 쿠바를 통치했다. 그를 혁명가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그를 반대파를 잔인하게 숙청한 독재자로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카스트로는 오래 살아남아 2016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또 한 사람의 쿠바 혁명의 영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긴 이름을 가진 체 게바라다. 아르헨티나의 의사 출신의 체 게바라는 혁명정부 쿠바의 중앙은행 총재와 장관을 역임하며 이인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쿠바의 높은 지위와 안락한 삶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제3세계 해방을 위해 쿠바를 떠났다.
콩고 혁명에 가담한 체 게바라는 이후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1967년 10월 미국 CIA의 지휘를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정글에서 사살됐다. 카스트로와는 달리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는 세계인의 가슴속에 영웅으로 살아남았다. 별을 단 베레모와 덥수룩한 구레나룻의 모습은 20세기 저항운동의 상징이 됐다.
그가 꿈꾸던 혁명의 세상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혁명의 이상도 세월과 더불어 변하고 혁명의 주역들도 타락하기 때문이다. 볼리비아 깊은 숲속에서 죽어간 게바라의 꿈은 그래서 살아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이상은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이탁오, 허균, 정약용 그리고 체 게바라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이자 사상의 혁명가였다. 이들의 꿈이 실현됐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들의 꿈을 꽃 피우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이상만으로 굴러가지 않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넓고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