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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Aug 17. 2022

햇빛과 달빛으로 그린 그 여름의 삽화

                                                                          


추억은 햇빛과 달빛으로 그린 삽화다.

한참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그때는 틈만 나면 친구들과 뛰놀고 쏘다니기 바빴다.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렸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그 시절은 왜 그리 하루해가 짧은지 속상했다. 적어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온종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어떻게 하면 신나게 놀까 그 생각만으로 하루가 다 갔다. 그 시절의 추억은 시간의 붓에 햇빛과 달빛을 적셔서 그린 삽화가 됐다.


한참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그때는 틈만 나면 친구들과 뛰놀고 쏘다니기 바빴다.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렸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그 시절은 왜 그리 하루해가 짧은지 속상했다. 적어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온종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어떻게 하면 신나게 놀까 그 생각만으로 하루가 다 갔다. 그 시절의 추억은 시간의 붓에 햇빛과 달빛을 적셔서 그린 삽화가 됐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흐릿해지고 가물거린다. 한참 세월이 가면 예전에 알았던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이 머리에서 지워진다. 먼 옛날 찍어둔 사진은 빛이 바래고 희미해진다. 기억도 그렇게 색이 바래고 잊힌다. 지나간 일이 맞나 틀리느냐를 따지는 건 기억의 역할이다. 그때의 장면을 설명하는 텍스트를 기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마다 삶의 고비가 없을 리 없다. 구곡간장 미어지는 사연 한둘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기억 저장소에 긴 설명문으로 남는다.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이 떠오른다. 세월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일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시간은 기억을 닳게 하지만, 추억은 더 선명하게 해 준다. 삶에 지치고 외로울 때면 한 번씩 꺼내 보느라 때깔이 새롭다. 추억은 설명이 아니라 그림이요 삽화다. 시간의 붓으로 햇빛과 달빛을 물감 삼아 잘 개어 그린 삽화다. 틈날 때마다 새로 붓질한다. 추억이 늘 선명하고 아름다운 까닭이다.


산골의 사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가난한 시골 살림이 더 쪼그라들었다. 한 입이라도 덜 요량으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몇 년을 외가에서 자랐다. 도회지로 이사하기 전 5학년 때까지 방학은 늘 외가 차지다. 외가라 해서 본가보다 살림살이가 딱히 나은 것도 없었다. 그래도 외삼촌들이 다 장성해서 코흘리개 하나 건사할 정도는 됐다. 어린 시절 추억은 외가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외가는 본가에서 30리 떨어진 산골에 있었다. 마을 앞뒤로 산과 고개가 자리하고 있어 낮에도 해가 잘 뜨지 않는 곳이다. 밤나무가 지천으로 자라 가을이면 온 동네 밤이 넘쳐났다. 마을에는 밤을 보관하는 큰 창고가 있었다. 얼마나 밤이 많았으면 마을을 ‘밤무지’라 부를 정도였다.


서쪽 골짜기 갓개울, 남쪽 등성이 갓등, 서북 골짜기 개산골, 서북쪽 산등성 구들비등, 박실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 구들비재가 마을을 에워싼다. 봄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꽃받등, 남쪽의 새앙재골 등 셀 수 없는 고개와 등성이 산 너머 마을로 이어진다. 원두동으로 가는 질등재, 동남쪽 골짜기 약골, 볼머골 등 아직 세지 않는 고개들이 즐비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산골은 온통 놀이터였다. 봄과 가을은 이 골짜기와 저 산등성을 넘나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봄이면 지천으로 핀 봄꽃 향기에 취했다. 진달래의 꽃받등에 올라 참꽃을 따 먹느라 정신없었다. 해가 서산에 걸릴 때면 나를 부르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산골에 울려 퍼졌다.


가을이면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는 개산골이 놀이터였다. 가을 깊은 산등성이에 누워 하늘을 보곤 했다. 단풍이 온산을 붉게 물들인 산기슭에 누워 인디고(indigo) 짙은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더디게 흐르는 구름만큼이나 시간도 느릿느릿 흘렀다. 나무하는 외삼촌 꽁무니를 졸졸 따르다 보면 달고 쌉쌀한 칡뿌리를 씹는 호사를 누린다.


겨울은 얼마나 추운지 아랫실못이 겨울철 내내 꽁꽁 얼었다. 짧은 겨울 햇살에 애타는 꼬맹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겨울 놀이터가 된다. 외삼촌이 만들어준 썰매를 타느라 겨울 한낮을 금방 보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뛰어놀기만 해도 하루해가 짧은 시절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 할까. 옆을 스쳐 지나가도 얼굴조차 알 수 없고 어렴풋이 이름만 입에서 맴돈다. 다들 어느 하늘 아래 선가 잘살고 있으리라 기도한다.


한겨울 휘영청 달이 밝은 밤 문풍지 바른 문을 열면 마당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작은외삼촌을 따라 볼머골로 토끼 사냥을 나간 것도 그때의 추억이다.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잠을 멀리하고 따라나선 까닭은 덫에 걸린 토끼와 꿩을 잡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저녁 밥상에 맛난 고기가 푸짐하게 올라온다.


그 여름의 삽화

어릴 적 산골 외가 동네에는 신작로가 있었다. 그 길에는 키 큰 군인들이 열병하듯 미루나무들이 서 있었다. 하루 한 번 오는 버스가 들어올라치면 동네 꼬마들이 꽁무니 빼고 따라갔다. 먼지 풀풀 거리는 그 길을 뭐가 그리 좋은지 신나게 뛰어다녔다.


여름 한낮 신작로에 들어서면 매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뭇가지에 매미들이 합창이라도 하는 날이면 귀가 따갑다. 그런 날이면 미루나무도 더위 먹은 듯 잎들이 축축 늘어졌다. 해가 길 한가운데로 오면 마을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곤 했다. 시끌벅적하던 동네 골목도 이때만큼은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이면 동네 꼬맹이들은 신이 났다. 더위 먹는 걸 아랑곳하지 않았고 쏘다녔다. 문밖을 나서면 훅하고 더운 바람에 주눅이 든다. 눅눅한 습기를 한껏 머금은 한낮의 열기에 사람들은 지쳐간다. 뜨겁게 달궈진 양철지붕에다 계란 반숙을 할 정도다. 땅에 뿌리를 둔 모든 것들이 더위에 지쳐 흐느적거린다.


시곗바늘도 더위에 지쳐 한참이나 느려진다. 어른들도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어디선가 더위를 시킨다. 꼬마들은 이미 개울가에 진을 치고 신나게 자맥질한다. 지금이야 개울이라 말하긴 그렇지만, 그땐 꽤 물살이 세서 힘자랑깨나 했다. 장마 끝난 개울은 한여름 동네 꼬마들의 수영장으로서는 제법 실한 모양새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홀라당 알몸으로 물가에 뛰어든다. 송사리를 잡느라 이리저리 물을 헤집는 놈과 물방개를 찾느라 물풀을 흔드는 놈들로 물가는 시끌벅적하다, 영악한 아이는 집에서 가져온 개구리참외를 물속에 숨겨 놓고 제법 기특한 미소를 짓는다. 여자아이들도 한쪽에 모여 치마를 걷고 물장난을 친다. 개중 암팡진 여자아이는 속옷 차림으로 냅다 물속에 뛰어든다. 시끌벅적한 동네 개울가의 여름 한낮은 그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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