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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Sep 11. 2022

광릉요강꽃의 멸종 위기와 '너 죽고 나 살자'

멸종 위기에 내몰린 광릉요강꽃

“와 꽃이 크고 예쁘다.”

“마치 복주머니처럼 생겼다.”     


광릉요강꽃


사람들이 광릉요강꽃을 보고 감탄한다. 4∼5월이면 연한 녹색이 도는 붉은 꽃이 핀다. 우리나라 자생식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알려졌다. 예쁜 자태를 뽐내는 여러해살이 난초다. 광릉에서 발견됐고, 요강을 닮았다 해서 광릉요강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잎이 치마를 닮아서 ‘치마난초’로 불리기도 하고 ‘큰복주머니란’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뿌리에 곰팡이가 함께해야 꽃이 산다. 곰팡이가 없는 장소로 옮겨 심어 봤자 살기 힘들다. 토질이 받쳐주지 않으면 재배가 안 된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뿌리를 캐가면 애꿎은 꽃만 죽인다. 서식지를 파괴하고 곰팡이까지 사라지게 한다. 사람의 탐욕 때문에 이 꽃이 멸종 위기에 몰렸다.


시도 때도 없는 사람 욕심 때문에 광릉요광꽃이 위기에 처했다. 혼자 보고 즐기겠다는 탐욕이 광릉요강꽃의 서식지를 끝장낸다. 산허리에 예쁘게 피는 꽃을 추억에서 지우려 한다. 사람 손이 타지 않는다면 광릉요강꽃도 멸종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광릉요강꽃이 절멸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선택 탓이다.


적자생존의 자본주의적 버전 '너 죽고 나 살자'

정글의 먹이사슬에서 2등과 3등은 1등에게 잡아 먹힌다. 그렇다고 1등이 2등과 3등을 모두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상위 포식자라 해도 먹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 자연의 먹이 피라미드에서 생명들은 치열하게 먹이 쟁탈전을 벌인다. 동시에 적절한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화로운 자연을 만든다. 상위 포식자가 정도껏 하지 하위 포식자를 아예 몰살하는 경우는 없다. 


놀랍게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은 동식물만 멸종 위기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을 사실상 멸종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현대 경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승자가 독식하면 패자는 가질 게 없는 구조다. 패자는 생존의 벼랑 끝에 선다. 승리하지 못하면 절멸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자본주의적 경쟁의 결과다.


그래도 지금은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 않으냐,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러니 이만하면 참 좋은 세상이다. 절대적 빈곤을 해결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산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이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과 멸시의 태도가 얼마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가.


과거 공동체 사회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자본주의 사회는 더 살기 힘든가? 공동체 사회는 공동으로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품앗이가 되었든 협동이 되었든 함께하지 않으면 외톨이로는 살 수 없었다. 지금처럼 시장이 발달해 모든 것을 사장에서 살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이웃과 유대를 맺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당연했다. 큰일이 생기거나 불행한 일이 닥치면 서로 도왔다. 지금보다 덜 외롭고 덜 고독했다.


칼 폴라니는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원시공동체 사회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기보다 더 행복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사막과 밀림지대에 남아 있는 원시 부족들은 물질 수준은 매우 열악하지만, 현대인보다 더 적게 일하고도 생존할 수 있다.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동물 고기나 과일을 오래 보관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더 많이 가지려 욕심낼 까닭도 없다. 필요한 양만큼 양식을 구했다.


먹고사는 문제만 놓고 본다면 원시 공동체 사회가 산업혁명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유리하다. 현대인이 장시간 노동을 하고 식량을 해결한다. 이에 비해 원시 공동체는 더 적은 시간으로도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삶의 만족도를 단순히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굶어 죽는 사람은 없고, 남이 가진 걸 의식할 필요가 없다면, 누가 이들을 불행하다고 말할까?


행복과 불행을 잘게 쪼개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할까? 개인이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바꿀 수 없다. 자신이 할 수 해법을 찾아야 한다. 크고 화려한 행복을 찾지 말고 작고 소소한 행복을 찾자. 머릿속에서 행복과 편리함을 잘게 쪼개는 건 어떨까? 조금 불편해도 몸을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편리함을 찾자. 그러면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도 누그러질 것이다. 남을 덜 의식하는 것만큼 정신 건강에 도움된다.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 없다면, 상대의 시선을 개의치 않은 내공을 키우자.


불행과 불편함도 마음속으로 잘게 쪼개자. 그것들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잘게 쪼개면 크기가 줄어든다. 불행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뇌 신경회로다. 머릿속에서 고통을 잘게 쪼개면 뇌 신경회로는 거뜬히 감당해낸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픔과 불편함이 별거 아니라고 일러주자. 뇌 신경회로는 정교하지만 참 속이기가 쉽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꾸 달래면 그런 줄 안다. 


세상의 많은 현자는 깨달음을 얻었다. 물질적 풍요에 마음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평온한 마음만 들여다본다. 그들은 행복도, 불행도 조각조각 내 인식한다. 기쁜 일에도 호들갑 떨지 않고 나쁜 일에도 크게 낙담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아주 잘게 쪼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억지로라도 행복과 편리함을 작게 만들자. 그렇게 하면 광릉요강꽃도, 타인도 절멸의 위기로 내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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