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펭귄의 헌신적 자식 사랑
“아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겨우 100m 거리의 숙소까지 오는 길이 이렇게 먼 줄 몰랐어요. 영하 40도의 날씨에 시속 100km가 넘는 눈 폭풍우를 헤쳐왔어요”
10년 전 모 방송에서 황제펭귄의 자식 사랑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황제펭귄은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남극의 얼음 위에서, 그것도 가장 추운 시절에 찍 짓기한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자기 발 위에 올려놓고 배로 품는다. 암컷은 먹이를 구하러 100km나 되는 먼바다로 떠난다. 알이 부화하기까지 보호하는 것은 수컷의 몫이다. 수컷은 얼음 위에 서서 강추위와 눈 폭풍을 온몸으로 받으며 알을 지킨다.
수컷들도 나름 꾀를 낸다. 은 몸을 밀착해 무리를 지어 알을 보호한다. 제일 바깥쪽에 있는 펭귄은 정면으로 눈보라를 맞는다. 그래서 순서를 바꿔가면서 앞쪽으로 나선다. 이런 자세로 수컷은 두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을 품는다. 암컷이 먹이를 구해 돌아오면 새끼를 안전하게 넘겨준다. 그제서야 수컷도 먹이를 구하러 바다로 뛰어든다. 황제펭귄 부부의 자식 사랑이 대단하다. 특히 황제펭귄 아빠의 헌신은 눈물겹다.
어느 정도 자란 황제펭귄 새끼들은 공동체 속에서 산다. 서로를 감싸고 보호하며, 먹이를 구하러 바다로 간 부모를 기다린다. 황제펭귄들은 함께 어울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처럼 펭귄 사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를 지켜준다. 한때 인간의 공동체 생활의 미덕이 황제펭귄 사회에는 남아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오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윈의 적자생존 논리를 유전자 세계로 끌어들였다. 유전자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한테 유리하다면 무엇이든 한다. 디킨스의 논리에 따르면, 황제펭귄이 눈보라를 맞으며 새끼를 보호하는 것은 종족 보존이라는 황제펭귄의 이기적 유전자의 위장술이다. 그렇다고 해도 황제펭귄의 자식 사랑은 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로병사 사슬 쪼개기
디지털 기술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만들었다. 세상의 수많은 구매자는 한 명의 승자에게 지갑을 연다. 단 1%의 점수 차이로 이겨도 우승자가 100%에 가까운 상금을 가진다. 아슬아슬하게 패한 2등이나 패자는 하루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한다.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극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족집게처럼 찾아낸다.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의 구매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1:1 맞춤형 판매가 가능해졌다. 더욱이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단 한 명의 소비자까지 싹쓸이하게 해 준다. 감나무에 남은 여분의 까치밥 하나 남기지 않는 완결성을 보인다. 인간의 이기심이 시장의 곡식 마지막 한 알까지 탈탈 털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은 소비 시장을 통합하는 대신, 공급 시장을 잘게 쪼갰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상품화했다. 탄생-성장-노화-사망에 이르는 생로병사의 사슬을 마디마디 쪼개 상품으로 만들어 판다. 태아가 착상하는 단계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맞춤형 상품이 쏟아진다. 인공 수정, 태교 상품, 시설 좋은 조산원, 학습지, 두뇌 발달 보조제, 요양병원, 양로원 등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상품 소비 사슬이 완성됐다.
꼭 필요한 물건인데 시장에서 구할 수 없다면 그것을 가진 사람의 선의를 바라야 한다. 이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어야 이웃을 찾는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시장에서 못 구할 것이 없다. 돈이 있으면 간과 쓸개까지 살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러니 타인의 호의나 선의를 기대하지도 않고 베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이기적 유전자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홀로서기를 강요한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대 사회가 정신 건강 측면에서는 그리 좋은 시기는 아니다. 풍요가 오히려 더 큰 정신적 결핍을 불렀다.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선의와 호의가 사라지면서 정신은 황폐해졌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것이 깊어지고 오래가면 우울함이 찾아온다.
욕망을 줄이고 쪼개 행복을 키우자.
세계적인 경제학자 사무엘슨(Paul A. Samuelson)은 "행복은 소비를 욕망으로 나눈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무엘슨의 말을 수식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행복 = 물질적 소비 ÷ 욕망
그는 무척 간단한 식으로 행복을 정의한다. 무한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무한의 소비가 보장되면 행복하다. 사람들은 사무엘슨의 행복 방정식을 소비를 장려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사고라면서 비판했다. 물질적 소비가 행복을 보장한다면 정신보다 물질을 높이 평가하는 물신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혹한 평가다.
이 방정식을 자세히 뜯어보면 물질적 소비를 늘리지 않고 욕망을 줄이면 행복이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슨이 주장한 바는 어차피 소비를 무한대로 늘릴 수 없다면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욕망을 줄이면 우리가 가진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하다는 것이 이 식이 주는 참된 의미다.
물질적 소비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헌신과 봉사 등 가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욕망을 줄이면 행복이 커진다는 것을 깔끔하게 보여주는 식이다. 사무엘슨이 주장한 바는 소비를 무한대로 늘릴 수 없을 때 욕망을 줄이면 행복이 커진다는 것이다. 욕망을 줄이고 쪼개면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이제라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찾자. 독서, 등산, 노래 부르기, 그림 그리기, 봉사 동아리 등 행복을 주는 활동이 많다. 각자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택하면 된다. 그리고 이기심에 휘둘리지 말고 이웃을 생각하자. 내 정신 건강을 위한 이기심의 위장술이라 해도, 그것이 덜 외롭고 덜 고독한 삶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