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도서관의 고요
가을볕이 좋은 날 아침 도서관에서 갔다. 의자에 앉아 평소 읽고 싶은 책을 꺼낸다. 책들의 속삭임이 아침 공기에 젖는다. 마음은 더없이 고요하고 청정하다. 마치 세상이 정지된 것 같은 깊은 침묵만 가득하다. 아무런 생각도 없고 의식조차 없는 말 그대로 텅 빈 공(空)’의 상태다. 책과 내가 하나가 된 몰아일체의 삼매경에 빠진다.
“악!!!”하고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것도 날카로운 금속성의 목소리다. 고요한 도서관의 정적이 일순간 깨진다. 이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떤 사람은 독서 삼매경에 빠져 무념무상의 상태라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공의 상태를 유지한다. 화라는 현상이 일지 않는다. 소리를 못 들었으니 마음의 변화를 뜻하는 색(色)이 생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화(火)가 치민다. 누군가 지른 큰 소리 때문에 화(火)라는 현상, 즉 색(色)이 생겼다. 소리를 듣자 조용한 공의 상태가 색이라는 화로 바뀌었다. 공이 색이 된 공즉지색(空卽是色)이다. 화를 참기 못하고 소리 낸 사람을 쏘아본다. 기분이 풀리지 않아 색을 붙들고 씩씩댄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내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화는 쉽게 가라앉고 마음도 다시 편안해졌다. 색이 일어났지만, 곧 놓아버리고 공의 상태로 돌아간다.
색(色)이라는 감정은 뇌 신경회로의 작용으로 생겨난다. "악!!" 하는 정적을 깨는 소리는 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뇌 신경세포로 전달된다. 이 전기 신호는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의 강을 건널 때 신경전달물질의 도움을 받는다. 기쁨, 평안, 고요함 등 감정의 신경전달물질들이 안정적으로 분비되면 마음은 공의 상태를 유지한다.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에 이상이 생기면 시냅스의 강을 건너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 신경 거슬리는 소리에 자극받은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이 과도하게 분비된다. 이들이 분노라는 정보를 싣고 한꺼번에 시냅스의 강을 건넌다. 이렇게 되면 화가 머리까지 치솟고 감정은 폭발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할까? 누가 나를 집적이고 약을 올려도 공(空)의 상태를 유지하면 된다. 반응을 보이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면 화날 일이 없다. 아니면 화가 나더라도 빨리 지워버리면 된다. 그걸 곱씹어 봤자 집착이 되고 정신만 어지럽다. 색이 공으로 돌아가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사랑도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하루가 멀다고 잔인한 사건이 일어난다. 헤어지자는 연인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해코지하는 일도 많다. 심지어 한때 다정했던 연인을 죽이기까지 한다. 머릿속의 뇌 신경회로가 헝클어져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완전히 깨졌다. 떠나는 연인의 행복을 빌어주려면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짜증, 화, 섭섭함, 이별의 고통은 색(色)이다. 색은 실체가 없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색이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옆에서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색이 일어나지 않는다. 설혹 순간적으로 화가 나더라도 그럴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면 금방 사라진다. 색은 공으로 돌아가고 마음의 평정심을 회복한다.
화 혹은 질투 같은 색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외부의 자극에 내 마음이 반응한 것이다. 계속 화를 낸다는 것은 내가 색에 붙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짜증과 화라는 색에 사로잡혀 스스로 옥죄며 산다. 빨리 색을 버리고 마음이 평정한 공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신경전달물질 분비의 일시적 장애를 일으킨 뇌 신경회로도 제 기능을 발휘한다.
우리 뇌에는 여러 종류의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이 가운데 한쪽이 지나치게 많거나 너무 모자라면 문제가 생긴다. 흥분 물질이 과다하면 화를 잘 참지 못한다. 인내와 용서의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하면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현상을 놓지 못하고 집착에 빠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평소 책 읽기, 음악 감상, 종교 활동, 봉사 활동 등 마음의 위안을 찾을 거리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신경전달물질이 안정하게 시냅스의 강을 건너고, 어떤 이별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칭찬받을 때의 기쁨과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의 뿌듯함도 마음의 일시적인 현상인 색이다. 이것도 마음속에 오래 붙들고 있으면 집착이 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에 이 또한 금방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사랑이 없기에 현상의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이별이 다가와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집착이라는 색이 사라지고 마음은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공(空)으로 돌리자.
화내는 것도 사랑에 집착하는 일도 모두 내려놓아야 마음이 편안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사랑의 감정을 멀리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고 공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그래야 혹시 모를 이별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만남과 헤어짐도 인연을 따르는 법이다. 그 인연을 거슬러 것은 색이라는 허상이 부른 집착에 불과하다.
말은 이렇게 해도 보통 사람이 행동으로 옮기기가 참 어렵다. 누가 내게 해를 끼치거나 염장이라도 지르면 참기 힘들다. 옆에서 화를 돋우거나 깐족거리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공(空)’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색즉시공'이라는 말을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청정한 마음에서 청정한 색이 나온다. 그러려면 먼저 마음을 비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 깨끗하고 담백한 공의 상태에서 밝고 건강한 색이 발현한다. 가족과 동료를 위한 공의 마음에서 배려와 호의라는 색이 발현한다. 그러니 늘 마음을 깨끗하고 청정한 공의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의지와 노력만 있으면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신경 회로는 바뀌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자연과학은 신경회로가 마음의 이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고, 인문학이 마음을 치유한다. 평정심을 찾은 마음은 뇌 신경회로를 변화시킨다. 우울함도 자연과학이 원인을 찾아내면 인문학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융합과 협력할 이유로 이만하면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