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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Nov 11. 2022

바람은 소리를 남기지 않고, 낙화(洛花)는 분분하다.

『채근담(菜根譚)』82편과 이형기 시인의 낙화(洛花)

바람은 소리를 남기지 않고, 기러기는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일상에서 좋은 글이나 명언을 만날 때, 종종 출처가『채근담(菜根譚)』인 것을 본다. 이 책은 시적이며 깊이 있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대부분 짧은 글들이지만, 삶의 지혜를 임팩트(impact) 있게 들려준다. 채근(菜根)은 풀이나 나무뿌리를 말하고, 담(譚)은 이야기를 뜻한다. 말 그대로, 풀뿌리나 나무뿌리 씹듯 두고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글들이다.


『채근담(菜根譚)』82번째 글을 읽어보자.

 '風來疎竹 風過而竹不留聲(풍래소죽 풍과이죽불유성)

  雁度寒潭 雁去而潭不留影(안도한담 안거이담불류영)

  故君子,事來而心始現 事去而心隨空(고군자, 사래이심시현 사거이심수공)


한자를 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해석을 읽는 게 편하다.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소리가 남지 않고,

 차가운 연못에 기러기가 앉아도, 기러기가 떠나면 그림자가 남지 않는다.

 군자 또한 일이 생기면 마음이 일고, 일이 끝나면 마음은 사라진다.'


자연은 늘 지나간 자리를 말끔히 치우고 흔적을 삼기지 않는다. 바람은 소리를 남기지 않고, 기러기는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바람은 대숲을 소유하지 않고, 기러기는 연못을 제 것으로 삼지 않는다. 잠시 머무르거나 스쳐 지날 뿐이다. 군자 또한 일이 있을 때 마음을 쓰고, 일이 끝나면 미련을 두지 않는다.


불교 경전 『법화경(法華經)』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멀리 더 멀리 보는 이는 높이 더 높이 난다. 그는 결코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흰 새가 호수를 떠나 하늘 높이 날 듯, 그는 이 집착의 집을 떠나 높이, 더 높이 난다."


나도 더 멀리 보고, 더 높이 날고 싶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집착의 집을 떠나고 싶다. 집착을 버리고 높이, 높이 날고 싶다. 안 되는 일을 하려 억지를 부리지 말자. 내려와야 할 때가 지났는데도 내려오지 않으면 추해진다.


나는 평소 시를 좋아한다. 하얀 종이 위에 주옥같은 문장을 그려내는 시인의 재주에 매번 감탄한다. 시인은 발명가이자 언어의 연금술사이다. 하긴 글을 짓는다는 면에서 보면 소설가도 그러하다. 무릇 글 잘 쓰는 이들의 재주는 남다르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한 이형기 시인의 '낙화(洛花)'도 좋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하고 시작하는 그 시 말이다. 이 시는 때를 알고 떠나는 모든 것들에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獻辭)다.


우리는 과연 떠날 때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언제 떠나야 하는지 가끔은 헛갈린다.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그것을 해낼 충분한 역량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젊은 사람이라도 자리에 맞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자리라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 조직과 딸린 많은 사람의 생계를 위해 바람직하다.

 

長江後浪推前浪(장강후랑추전랑)인데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신기술이 쏟아지고, 새로운 정보가 홍수를 이룬다. 아차!! 하면 따라가지 못하고 뒷북치는 일이 허다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총명함이 흐려진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전문성은 떨어지고 판단력도 흐려진다. 그것은 변화를 따라가기에 버겁다는 뜻이다.


그때가 물러날 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력이 모자라는 것을 힘으로 찍어 누른다. 새로운 사람을 키우지 않고 자기의 성을 견고히 한다. 강물이 흐르면 앞 물결은 자연스레 뒷 물결에 자리를 내준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 밀려나지 않으려고 문고리를 잡고 발버둥을 친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바람과 달리 인간은 끝까지 자리를 어지럽힌다.     


'長江後浪推前浪, 一代新人煥舊人(장강후랑추천랑 일대신인환구인)

장강(양쯔강)은 뒷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고, 새 인물이 옛사람을 대신한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격언집 '증광현문(增廣賢問)'에 나오는 말이다. 세대교체를 통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사회를 이끈다는 말로 쓰인다. 원뜻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새 사람을 키워 사회를 이끌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리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늙은 뱃사공이 물길을 안다'는 말처럼, 그들의 지혜를 젊은 뱃사공에게 일러주는 것은 좋다. 문제는 더 이상 늙은 뱃사공의 지혜가 필요 없을 때, 물러갈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길조차 모르면서 뭉그적거리고 물러나지 않는 뱃사공이 많다. 상류에 댐이 생겨 물길이 바뀐 지 오래다. 그것도 모르고 고집을 부리는 늙은 뱃사공은 배를 뒤집고 선원들까지 죽게 만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슴이 이끄는 사자들의 무리가 아니라, 사자가 이끄는 사슴들의 무리이다."라고 알렉산더 대왕이 말했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왕 알렉산더 대왕도 리더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고 강조했다. '무능한 병사는 자기만 죽지만, 무능한 장군은 부대를 몰살시킨다'는 말도 있다. 지도자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 나게 말한다. 『채근담』과 『법화경』 그리고 『증광현문』은 한결같이 박수 칠 때 떠나라고 권유한다. 그것은 분분한 '낙화(洛花)'의 지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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