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고요 속의 고요함은 고요가 아니다.
『채근담(菜根譚)』88편 '고요 속의 고요함은 고요가 아니다'를 읽어보자.
'고요 속의 고요함은 참 고요가 아니다.
고요한 곳에서 고요함은 참다운 고요함이 아니다.
소란함 속에서 고요함을 지켜야만
마음의 참다운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즐거운 속에서 즐거움은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다.
괴로움 가운데서 즐거운 마음을 얻어야만
마음의 참된 쓰임새를 볼 수 있다. '
멋진 말이다. 고요한 가운데 있다면, 따로 고요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즐거움 속에 살면 즐거움이 당연하다. 그건 내가 노력해서 얻은 고요도 아니고 즐거움이 아니다. 거저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소란스러운 저잣거리에서 고요함을 찾고, 괴로움 가운데서 즐거운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내 마음이고, 마음이 제대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소음, 자동차 소리, 요란한 악다구니, 그 모든 소란함 속에서도 고요한 마음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괴롭고 힘들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마음이고, 그것이 진정한 내 실력이다.
이 말을 확대해석하면, 좋은 환경, 좋은 상황에서 잘하는 것은 잘한 것은 아니다. 그리 큰 자랑이라 할 수 없다. 그저 운 좋게 받은 것들이라 진정한 나를 가름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어남이 내 의지가 아니고, 또 내 부모를 내 의지로 선택한 것도 아니다. 남보다 못한 환경에서도 잘해야 그게 진짜 잘하는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세상살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정된 자원을 갖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다. 출발부터 남보다 더 가진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출발선이 저만치 앞서 있다. 비슷한 조건이라면 경주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밤잠을 설쳐 공부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노력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지만, 그것을 해내기가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다.
그렇다고 세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해야 하등 도움 될 게 없다. 오히려 속만 상하고 의욕만 꺾일 뿐이다. 틈새를 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성경에 나오듯 양치기 다윗이 거인 병사 골리앗을 이길 줄 누가 알았나.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 게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영리하게도 돌팔매를 준비해서 거인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다. 기적 같은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이다.
소란함 속의 고요함을 찾았고, 역경 속에서 성공한 것이다. 덩치도 작고 전투 경험이 없는 양치기 다윗이 자기가 제일 잘하는 돌팔매로 승부를 걸었다. 역사 속에서 그런 예는 한둘이 아니다. 어려운 역경을 딛고 훌륭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많고 많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더없이 충만한 삶을 일군 사람들이다.
법화경(法華經)에서는 고뇌가 삶을 충만하게 만든다고 한다. “고뇌의 이 불길 속에서 오히려 무르익어 감이여! 내 삶은 더없이 충만하여라. 고뇌의 이 기나긴 밤 지나면 그 영혼에 새벽빛 밝아 오리라,”하며 법화경은 말한다. 법화경의 이야기는 고뇌의 아픔을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고뇌의 이 불길이 지나면 영혼은 그만큼 성숙하고, 삶은 충만할 것이다. 그러니 새벽이 환하게 밝아 올 때까지 고뇌를 참고 견디라는 주문이다.
고뇌의 불길이 끝나고 고뇌를 끝내 극복하고 난 후의 말이다. 그러나 고뇌의 불길 속에 있을 때는 몸과 마음이 온통 타버린다. 아픔과 고통으로 짓이겨진다.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고 고름이 나온다.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건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할 몫이다.
『채근담(菜根譚)』 99편에는 '역경에 처해 있을 때는 주위가 모두 침(鍼)과 약(藥)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절조와 행실을 닦게 된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눈앞이 모두 칼과 창이어서 살을 말리고 뼈를 깎아도 깨닫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역경에 처해 있을 때 모든 것이 침이 되고 약이 된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뭐가 약이 되고 침이 된다는 말인가. 자기 위안에 불과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경을 이기고 견디고 나면, 그 모든 상황이 영혼을 성숙하게 만든 보약이고 좋은 침인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역경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견디느냐가 관건이다. 차라리 살을 말리고 뼈를 깎아도 모든 일이 순조로우면 좋겠다.
지나고 나면 아픈 기억도 추억이 된다. 그건 그 아픈 기억을 이겨냈을 때 이야기다. 그 고통에 함몰되었을 당시에는 참 아프고 참 고통스럽다. 오로지 이빨을 앙다물고 견뎌야 한다. 답은 바로 그것뿐이다. 절대 무너지지 말고, 절대 굴복하지 말고 견뎌야 한다. 오직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모든 것은 지나고 난 후 적는 감상문이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독일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만큼 고통을 절절하게 말한 사람도 없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고통은 인간의 창조성을 발현하는 자극제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아팠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가 나에 대해 가장 행복하게 느꼈던 시간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니체의 고통 예찬론이라 할 수 있다.
괴테의 말은 또 어떨까? “괴로움이 남기고 간 것을 맛보라! 고난도 지나고 보면 감미롭다.” 괴테의 말은 고통의 시간도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도 한참 지나 되돌아보면, 상처도 아물고 애틋함으로 남을 수 있다.
역경과 고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위인들의 말은 차고 넘친다. 다 맞는 말이다. 적어도 그들은 고통을 이겨내고 위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들의 역경은 영광으로 빛났고, 그들의 고통의 환희로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통으로 좌절하고 역경으로 무너지는 사람도 많다. 그들에겐 차라리 애초 고통이 없고 역경이 없는 게 더 낫다. 할 수 있다면 고통과 역경을 피해야 한다. 굳이 영혼의 성숙을 기대하고 고통의 굴레에 빠질 사람은 없다. 아픈 건 아프고, 힘든 건 힘들 뿐이다.
나침판도 없고, 까만 밤 바닷길을 인도할 무엇도 없는 아득한 시절이 있었다. 선원들은 늘 북쪽 하늘 끝을 올려보며 망망대해의 짙은 어둠을 헤쳐갔다. 그때는 북극성만 보고 배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선원들에게 북극성의 별빛은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이자 까만 밤의 휘장 너머를 밝히는 등대와 다를 바 없다.
지구에서 북극성까지는 빛이 밤낮없이 430년 동안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이다. 북극성을 떠난 별빛이 430년 후에야 뱃사람들 머리 위로 내려온다. 오늘 밤 바라보는 북극성의 별빛은 1,592년 어느 밤에 출발했을 것이다. 북극성을 보고 항해하는 것은 그곳으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방향을 알고, 길을 찾을 수 있다. 희망의 북극성을 머리 위에 두고, 고통을 이겨내라는 위인들의 말을 삶의 등댓불로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