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소나타 1
색의 유혹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만큼이나 아득한 옛날이야기다. 미국 출장 가는 길에 대도시 근교의 아울렛(outlet)을 방문했다. 유명 명품 매장에 들렀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큰 호강이었다. 당시에 한참 유행하던 BENETTON. GUESS, GAP 매장에 진열된 옷을 보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검정이나 흰색 옷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형형색색이 주는 화려함에 눈이 즐거웠다. 빨강과 파랑의 원색도 있고 파스텔톤(pastel tone)의 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색채의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이처럼 다양한 컬러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그림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도 그림 감상을 좋아해서 미술관을 다니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미술관을 탐방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화가들이 그려내는 화려한 색의 다채로움과 질감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해외 출장을 가면 꼭 그 도시의 미술관을 찾았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파리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센터, 뉴욕 현대미술관을 방문했다.
방문한 미술관의 면면이 세계적 명성을 얻는 곳이다. 작품 수도 어마어마하고, 내로라하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즐비하다. 그 많은 작품을 스치듯 구경한다는 것은 작품 감상의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화가와 작품을 제대로 공부하고 미술관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울렛에 진열된 옷의 화려한 색깔에서 출발한 호기심이 색채의 유혹에 빠지게 했다. 좀 겸연쩍긴 하지만, 처음에는 그런 동기로 색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얀 목련과 빨강 장미가 펼치는 색의 향연
지금까지 보라, 빨강, 파랑 이야기를 글로 썼다. 이어서 노랑, 주황 이야기를 쓰려다가 잠시 멈추고 생각했다. 봄날의 하얀 목련과 빨간 장미, 한여름의 짙은 초록, 가을 단풍, 노란 은행잎 등 도대체 이 색들은 어디서 왔을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색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색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서는 빛을 알아야 한다. 빛 속에 색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빛의 본질을 알아야 색을 알 수 있다. 빛과 색채는 물리학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미학의 영역이다. 그러다 보니 빛과 색채 이야기를 하다 보면 까다로운 이론과 만난다. 고전물리학과 양자물리학 이야기를 다룰 수밖에 없다. 가능하면 물리학 이야기를 줄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물리학과 미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화려한 색이 어디서 나오는지 슬기로운 탐구 생활을 시작하자. 먼저 빛과 색채의 관계를 알아보자. 데카르트와 뉴턴의 색채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아마 읽기가 까다로울 수 있다. 괴테의 색채관을 알면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아는 데는 약간의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수고를 하고 새로운 것을 알면 기분이 좋아졌으면 바람을 가져본다.
우리가 아름다운 빨강 장미와 하얀 목련을 눈으로 보는 것은 빛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깜깜한 밤이 있을 뿐이다. 모든 사물은 짙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 되면 빛은 사방천지 가득하다. 넓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의 화려한 잔치가 시작된다. 그들의 향연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고 잠자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한다. 우리가 장미꽃도 목련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빛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빛이 뿌린 색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본다.
데카르트와 뉴턴의 색채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빛은 색이 없는 투명한 상태라 여겼다. 르네상스 이후 철학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색채의 본질을 탐구하였다. 그러다가 르네상스가 시작될 즘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테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논리적으로 색채의 본질을 해석했다.
데카르트는 빛은 특정한 색상이 없는 백색이며, 무지개색은 프리즘 재질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라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주장을 빌면, 빛의 입자들은 회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흰빛이 유리를 통과하면서 입자의 회전이 바뀐다. 이때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회전하는 빛 입자가 서로 다른 색깔로 우리 눈에 들어온다.
데카르트는 빛에서 색깔이 분리되는 까닭은 물체의 재질이 미치는 영향 탓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빛은 원래부터 아무 색깔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색깔이 있다고 해도 프리즘 재질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빛이 색깔을 보이지만, 빛 자체에는 색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재 물리학자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은 물체 자체에 색이 있고, 빛에는 색이 없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실험했다. 그는 두 개의 프리즘으로 빛을 두 번 분리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첫 번째 프리즘으로 백색광(태양 빛)에서 분리된 색깔 중에서 빨간색을 선택했다. 그리고 난 후 다시 그 빨간색을 프리즘으로 통과시켰다. 그 결과, 두 번째 프리즘으로 빨간색을 통과시켜도 빨간색이 나왔다.
만일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프리즘 표면 입자의 재질로 파란색이 나왔다고 하자. 그러면 파란색이 두 번째 프리즘을 통과할 때 역시 입자의 회전이 달라지기에 다른 색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 프리즘을 사용해도 파란색은 파란색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뉴턴은 백색광에서 색깔이 나오는 이유는 프리즘 재질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프리즘 실험을 통해 뉴턴은 빛 자체가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뉴턴 덕분에 사람들은 색의 원천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뉴턴은 무채색인 백색의 태양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켰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은 프리즘을 통과할 때 굴절률의 차이를 보였다. 그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색을 만든다는 사실을 밝혔다.
색의 굴절률은 각 색채의 빛이 가지는 파장의 차이다. 뉴턴의 해석에 따르면, 태양 빛에 들어 있는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이 산란과 굴절을 통해 다양한 색깔을 뿌린다. 뉴턴 덕분에 빛은 만천하에 자기 본색을 드러냈다. 이렇게 해서 뉴턴은 빛이 색채의 고향이며 색채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혔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색은 빛이고 빛은 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괴테 색은 빛의 행위이자 고통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1749~1832)는 세상에는 노랑의 밝음과 파랑의 어둠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노랑의 밝음과 파랑의 어둠이 서로 힘을 겨루면서 경계가 합쳐지고 중첩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색채가 발생한다. 노랑과 파랑 가운데 어느 쪽으로 많이 쏠렸는지, 어느 힘이 더 강한지에 따라서 그쪽에 가까운 색이 나온다. 괴테는 색채가 노랑과 파랑의 힘의 균형과 대립에서 발생한다고 봤다. 그는 빛과 어둠의 힘겨루기에서 원초적 색(빨강, 노랑, 파랑, 보라)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괴테의 색채론은 과학적 실험의 결과가 아니라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화가들과 문학가들은 괴테의 색채론을 좋아했다. 특히 그림에 본격적으로 빛을 도입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괴테의 색채 이론을 잘 활용했다. 색채의 근원이 빛과 어둠이라는 그의 주장은 인상주의 화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줬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빛과 색채의 강렬한 대비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색은 빛의 행위이자 고통이다"라고 괴테는 말한다. 그는 색채를 ‘빛의 고통’이라는 다분히 문학적이면서 철학적으로 표현했다. 괴테는 빛 속의 파랑과 노랑, 밝음과 어둠의 힘겨루기가 색채를 만든다는 문학적 색채관을 보였다. 밟음과 어둠의 치열한 힘겨루기는 빛 내부의 고통이고, 그 고통의 결과가 아름다운 색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괴테의 표현을 빌리면, 빛이 대기 중에서 공기나 먼지 입자와 충돌하면서 부서지는 것도 빛의 행위이자 고통이다. 저 먼 하늘에서 파편으로 흩어지는 빛의 고통과 멍울이 하늘을 물들인다. 만일 대기 중에 공기도, 먼지도, 입자도 없다면 빛의 아픔도, 빛의 멍울도 없다. 그럼 빛은 색을 뿌리지도 못한 채 그저 백색광만 남는다. 그것도 대기가 진공 상태라면 빛의 존재조차 없는 깊은 어둠뿐이다.
색채는 물체의 재질 차이 때문에 생긴다는 데카르트의 색채론은 틀렸다. 빛 속에 색채가 있다는 뉴턴의 생각이 맞다. 프리즘을 이용해 빛의 산란을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괴테는 색채의 근원을 ‘빛의 행위와 고통‘이라고 문학적이며 시적으로 표현했다. 과학적 논거와는 거리가 있지만, 괴테의 색채론이 더 낭만적이고 가슴에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