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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Dec 04. 2022

검정, 오드리 헵번의 검정과 '티파니에서 아침을'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뉴욕 맨해튼의 새벽 거리, 아름다운 여인이 택시에서 내린다. 검은 드레스와 얼굴을 반이나 가린 선글라스의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크루아상을 뜯어 먹는다. 그러면서 티파니 보석 가게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언젠가는 다 갖고 말겠다는 눈빛으로 보석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신분상 상승을 꿈꾸며 살고 있는 홀리(오드리 헵번)이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1)>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생략하고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고 나온 검정 드레스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자. 헵번은 영화 속에서 올림머리 스타일에 화려한 진주 목걸이와 긴 장갑을 착용하고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를 입었다. 이것으로 20세기 영화산업의 가장 성공적인 아이콘의 하나인 ‘헵번스타일’이 탄생한다.  


리틀 블랙 드레스는 원래 샤넬이 먼저 발표했다. 당시의 화려한 색상의 디자인과 달리 검은색의 지극히 단순한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상복이나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검정을 여성의 옷으로 확장했다. 이것을 지방시(Givenchy)가 헵번의 검정 드레스로 거듭나게 했다. 영화의 헵번스타일은 지방시는 물론이고, 뉴욕 티파니 본점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검정 드레스의 헵번스타일은 지금도 젊은 여성들의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가 높다.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독일의 광고 그래픽 전문가 하랄드 브램(Harald Breaem)의 저서 『색의 힘』(일진사, 2010)에서 검정은 성(性)적 매력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색이라고 말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도에선 여성의 검정 눈 화장을 성적 표현으로 해석했다. 검게 화장된 눈은 깊이가 있어 은밀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런 이유로 속눈썹에 검게 화장하는 풍습은 수천 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20세기까지 서구 의류에서 검정은 주로 절제, 겸양, 애도 등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이 개빈 에번스(Gavin Evans)의 말이다. 그는 1910년대부터 검정은 냉철하고 진지해 보이기만 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패션을 주도하는 다양한 색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샤넬이 발표한 리틀 블랙 드레스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됐다. 그리고 영화 <티파니의 아침을>의 헵번스타일 덕분에 검정 드레스는 여성성의 전형으로 꼽히는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다.       


공포와 암흑에서 세련됨과 권위의 색으로

검정 혹은 검은색은 색이자 무채색(無彩色)이다. 색조가 없는 색으로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두 색 사이의 색상(色相)과 채도(彩度)를 갖지 않은 색을 무채색이라 한다. 무채색은 빨강, 파랑, 노랑 같은 색상도 없고, 색의 선명도를 뜻하는 채도도 없다. 대신 밝고 어둠의 명도만 가지는 색이다. 


미셀 파스투로는 ‘검정’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공포, 암흑, 죽음, 애도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나 검정은 존중의 의미도 가진다. 수도사들이 입었고, 종교 개혁가들이 좋아했다. 그들은 절제와 겸양과 엄숙의 상징으로 검은색 옷을 입었다. 그리고 최근 법관의 법복과 최고급 자동차의 색깔로 사용될 만큼 검정은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를 갖는다.      


화학적으로 진정한 검정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미셀 파스투로는 말한다. 화가들인 사용한 질 좋은 검정은 소량으로만 생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대개 고열로 태운 상아 등 값비싼 재료가 포함됐다. 아름다운 검은색을 내긴 했지만, 터무니없이 가격이 비쌌다. 중세 말에 이르기까지 회화에서 검정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검정은 드문 색이었다고 말한다. 14세기 중반부터 서양에서 검정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간소함과 엄격함을 추구하는 신교도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검은색이 크게 유행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강렬하고 화려한 색상들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고, 정중하고 어두운 색깔의 사용을 권장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루터와 같은 사제뿐만 아니라 유럽의 왕과 제후들도 검은색 옷을 즐겨 입었다. 질 좋은 검은색은 귀족의 색으로 등극했다.      


'성 마태오의 소명'(1599~1600) 카라바조


검은색을 그림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덕분이다. 빛과 어둠을 회화의 전면에 등장시켰지만, 두 사람이 어두움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지금부터 스텔라 폴(Stella Pole)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레오나르도의 그림자는 회색인데 반하여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검은색이다. 레오나르도의 가장자리는 부드럽지만, 카라바조의 가장자리는 선명하다. 레오나르도는 전체 색조를 중간 단계로 조정했지만, 카라바조는 가장 어두운 검은색으로 강렬한 빛을 세부까지, 자신의 작품에서 밝음과 어둠을 한껏 대조시켰다.      


카라바조가 연출한 빛과 어둠의 연극에서 주역은 단연 검은색이다. <성 마태오의 소명>에서 그는 그림의 3/4을 더할 나위 없이 어두운 그늘로 감쌌다. 카라바조가 어두운 그림자를 사용한 방식은 많은 예술가를 매료시켰다. 카바라조의 붓을 통해 검은색은 회화에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 후 많은 화가가 빛의 밝음을 강조하기 위해 어둠을 검은색으로 짙게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고급스러운 검정과 고급스러운 침묵

검정만큼이나 세대 간에 좋음과 싫음이 엇갈리는 색깔도 없을 것이다. 젊은 사람은 검은색이라고 하면 세련된 옷과 값비싼 자동차와 같이 고급 소비 요구를 떠올린다. 반면에 나이가 든 사람들은 검정을 죽음과 가까이 있는 색으로 여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이 검정을 좋아하고, 나이가 들수록 검정을 멀리한다.

     

검은색은 강한 힘이 느껴지고 권력과 복종, 카리스마를 풍기는 색깔이다. 절대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검은색을 많이 이용했다. 검은 양복과 검은 드레스는 차분하고 도시적인 느낌을 준다. 차가운 도시 남자와 도시 여자의 이미지를 살리려면 깨끗한 검은색 정장을 입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최근에는 검은색은 힘, 단호함, 결단력, 지적, 고급스러움 등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윤이 나는 질 좋은 검은색이 가지는 고급스러운 느낌 때문이다. 또 고급스러운 검은색은 심리적으로 편안함과 보호, 신비감을 주는 색상이다. 검은색은 그 쓰임에 따라 품위, 세련미, 우아함, 현대적 느낌을 준다.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기본 색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검은색은 단순함과 아름다움이 결합한 색으로 여성의 우아함과 남성의 정중함을 표현하는 색깔로 인기가 높다. 샤넬, 크리스천 디올, 베르사체, 입생 로랑과 같은 미와 관련된 향수와 패션 회사들이 검정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 있다.


검정은 말이 없는 침묵에 가까운 색이다. 고급스러운 검정은 세련미와 권위를 상징한다. 고급스러운 침묵도 사람의 품격을 높인다. 요즘은 말 잘하는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가 대세다. 말이 빠르고 잘하면 좋은 점도 많다. 그렇지만 말 많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도 만만치 않다. 말은 한 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말에도 취소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 취소 버튼을 누르면 말이 되돌아보고, 들은 사람의 기억을 포맷하는 그런 기능은 없다. 말이 많고 빠른 것보다 어눌한 침묵이 좋을 때가 많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구설에 오르는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이 유행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살짝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그러나 타인의 이야기나 슬픔에 악플을 달아 비난해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람과 관련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도 삼갈 일이다. 나 즐겁다고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은 화려하지 않지만 경박하지 않다. 짙은 검정은 다른 색을 돋보이게 해 준다. 사람도 침묵으로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해 주면 어떨까. 지금은 세련된 검정만큼이나 세련된 침묵이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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