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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Dec 03. 2022

주황, 오렌지를 품은 에르메스의 놀라운 한 수

오렌지색은 이름이 없다.  

오렌지색은 이름이 없다!!! 뚱단지같은 소리로 들리지만 사실이다. 주황 혹은 오렌지색은 색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 고유의 이름이 없다. 다른 색들은 빨강(red). 노랑(yellow), 파랑(blue), 초록(green)이라는 자기 이름이 있다. 주황색의 영어 이름은 과일 오렌지(orange)다. 우리말 주황(朱黃)도 붉을 주(朱)와 누를 황(黃)을 합한 말이다. 원래부터 가진 고유한 자기 이름이 아니다.

  

오렌지색은 오렌지 맛과 향기를 따라 이름이 퍼져나갔다. 영국 런던대학교 교수 개빈 에번스(Gavin Evans)의 말에 따르면, 오렌지는 4,500년 전쯤 중국에서 처음 재배된 이후, 실크로드를 거쳐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했다. 오렌지가 유럽에 상륙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오렌지색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오렌지색인 주황을 노랑-빨강(yellow-red)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랫동안 잊혔던 색이다.  

  

독일의 색채 전문가 에바 헬러(Eva Heller)는 주황 혹은 오렌지색이란 이름은 과일 오렌지와 함께 생겨났다고 말한다. 오렌지가 유럽에 들어오기 전에 출판되었던 옛날 책들을 아무리 찾아봐도 주황이란 말은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색채의 대가인 괴테도 ‘노랑 빨강’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니 더 말할 게 없다. 역사의 전면에 늦게 등장하다 보니 노랑이나 파랑이 받은 오욕의 시간조차 없었다. 그 덕분에 흑역사를 겪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사진 출처 : https://natuurhuys.be/products/vervulling-1-ml-set


16세기가 들어와서야 오렌지라는 색의 이름이 유럽 국가에서도 널리 채택됐다. 유럽에서도 본격적으로 오렌지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달콤한 오렌지 맛을 알게 되자 색도 번듯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당근, 호박, 고구마, 오렌지 등의 주황은 카로틴 색소에서 비롯된다. 나뭇잎이 주황으로 물드는 것도 엽록소가 사라진 후 카로틴이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능소화, 털중나리, 금관화, 달리아 등 주황의 꽃들은 무척 화려하다.

 

주황은 활동성과 호기심을 상징하는 외향적인 색이다.심리적으로 따뜻하고 편안하며 갈등을 이완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와 반대로 불안을 유발하거나 경계의 색이기도 하다. 주황은 눈에 잘 띄는 색으로 산업 현장에서 안전색채로 많이 이용한다. 이 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활동적이고 건강하며 낯가림이 적고 개방적이라고 한다. 경쟁심이 강해 다른 사람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도 주황의 특징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오렌지 찬양

라이너 마이라 릴케(René Maria Rilke, 1875~1926)는 프라하 출신의 시인으로 『말테의 수기』와  『두이노의 비가』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 유럽 최고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뮤즈인 14살 연상의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1937)와 릴케의 연애는 전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도 유명했다. 독일 출신의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루 살로메는 니체와 프로이트, 융, 바그너 등 세계 최고의 철학·예술가들과 사랑과 교감을 나누었다. 그녀는 이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준 매력적인 여인이다.


릴케는 우리나라의 시인 백석, 김춘수, 윤동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춘수는 릴케의 시집을 보고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시 '별 헤는 밤'에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름을 넣었다. 그런 릴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부 15편에서 오렌지와 오렌지색을 찬양한다. 사람들에 오렌지 색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기다려라.... 맛있구나.... 하지만 어느새 도망친다.

 .... 약간의 음악에 발구름, 흥얼거림만 있으면 ㅡ

 소녀들아, 다정한 소녀들아, 너희 말 없는 소녀들아,

 너희들이 맛본 과일의 그 맛을 춤추어라!     


 오렌지를 춤추어라. 누가 그것을 잊을 수 있을까,

 제 몸속에서 익사하면서 달콤함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오렌지의 모습을. 이제 너희들이 손아귀에 넣었구나.

 오렌지는 달콤하게 너희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오렌지를 춤추어라. 더 따뜻한 풍경을

 너희들 가슴 밖으로 내던져라, 잘 익은 그 과일이

 고향의 미풍 속에서 밝게 빛나도록! 얼굴을 붉히며,   

  

 향기를 한 꺼풀씩 벗겨라. 관계를 맺어라,

 몸을 사리는 순결한 껍질과

 행복한 몸속에 가득한 그 달콤한 즙과!’      

 

   

'인상, 해돋이' 모네(1872)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화가들은 본격적으로 오렌지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1872년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인상, 해돋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오렌지색 해가 솟는 아침 풍경을 인상 깊게 표현했다. 이 작품은 과거의 사실주의와 전혀 다른 새로운 화풍의 인상주의가 세상에 등장했음을 알렸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폭에 적극적으로 주황을 사용했다.    

  

색채의 마술사로 알려진 앙리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 1869~1954)를 중심으로 한 야수파 화가들은 인상주의자들조차 쓰기를 두려워하던 강렬한 주황색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릴케가 시에서 주장한 “오렌지를 춤추어라. 더 따뜻한 풍경을 너희들 가슴 밖으로 내던져라”라고 하는 주문을 야수파가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도전적이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주황색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      


오렌지를 품은 에르메스의 놀라운 한 수

명품 브랜드 판매 기업인 에르메스는 1837년 독일계 이민자 티에리 에르메스(Tierry Hermès)가 파리에 설립한 회사다. 에르메스는 말안장과 마구(馬具) 용품을 제작해서 판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 끄는 마차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촘촘한 박음질과 고급 가죽으로 만든 에르메스의 마구 용품은 유럽 왕실에서도 좋아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에르메스의 로고에 말과 마차, 기수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 사진 출처 : https://bagslounge.com/know-your-brand-hermes/


위의 그림은 에르메스 로고를 만든 밑그림이다. 손님을 기다리며 서 있는 마부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올려다본다. 말은 기운찬 모습으로 네 발을 땅에 굳게 딛고 서 있다. 당당한 최상의 모습으로 손님을 기다린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마부와 말이 세련되고 우아한 마차로 손님을 기다리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 에르메스 로고다.


   


에르메스는 1950년대 초부터 브랜드의 상징색으로 오렌지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죽 제품 회사로 출발한 에르메스는 밝은 가죽의 이미지를 가진 오렌지색을 회사 로고로 선택했다. 제품과 이미지의 연속성을 보장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로고 글자 E 위에 프랑스의 악센트 표시를 살림으로써 패션과 문화의 중심인 프랑스 제품이라는 자부심을 자랑한다.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으로 세계 최고의 명품 패션 브랜드라는 평을 듣는 에르메스가 오렌지를 품은 것은 ‘신의 한 수’가 됐다.


평소 주황을 많이 사용하거나 주황색 옷만 골라 입는 사람은 자극에 민감하다. 빨강과 노랑이 주는 강한 색채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주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개방적이라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이들은 예의 바르고 밝고 명랑한 성격이라 인기가 높다. 하지만 가끔 허세와 유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일부 부유층 자녀들의 일탈 행동에 오렌지색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렌지색은 밝지만 노랑처럼 너무 눈부시지 않다. 따뜻하지만 빨강처럼 너무 뜨겁지도 않다.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따뜻하게 해 줄 만큼만 빛난다. 오렌지색은 활력과 만족, 유쾌함과 적극적인 마음을 북돋운다. 독일의 광고 그래픽 전문가 하랄드 브램(Harald Breaem)의 말에 따르면, 주황은 그렇게 뜨겁지 느껴지지 않으면서 난롯가에서의 따뜻하고 편안한 기온을 떠올린다. 또 촉감면에서 노란색보다는 조금 더 따스하다. 시각적으론 햇볕에 잘 익은 결실, 풍족한 느낌의 추수감사절 등이 연결된다고 한다.


우리의 삶에 오렌지 향기만 가득하면 좋겠다. 아쉽지지만, 삶은 늘 향기로운 것은 아니다. 너무 뜨겁지 않으면서 따뜻하고 편안한 기온을 느끼는 삶을 살면 좋겠다. 슬프도 너무 절망하지 않고. 기쁘다고 너무 티 내지 않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빨강의 뜨거움보다 약하지만, 노랑보다 조금 더 따뜻하면 좋다. 


며칠째 추위가 날카로운 고양이 발톱처럼 얼굴을 할퀸다. 제때를 만난 듯 힘자랑하기 여념 없는 매섭고 앙칼진 겨울이다. 하긴 겨울이 이런 독한 맛이 있어야 제격이다. 뜨뜻미지근하면 어찌 겨울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몸도 마음도 추운 건 사실이다. 이럴 때는 따뜻한 난롯가에서 잘 익은 오렌지를 까먹고 싶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과즙을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시린 겨울이 끝나면 따뜻한 봄날이 오듯, 내 생의 봄날이 오길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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