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발명과 1차 지식혁명
“만약 내가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에 가능했다”라고 뉴턴은 말했다. 뉴턴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도 사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이 쟁쟁한 선각자들의 지식 덕분이라는 뜻이다. 인류 최고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꼽는 뉴턴의 겸손한 면모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말로 알려졌다. 이 말이 뉴턴의 겸손함을 담은 말인지 아닌지 진위는 논란이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란 무엇일까? 선배 과학자들의 신체적 어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선 무수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축적해 둔 지식을 뜻한다. 선각자들이 발견한 과학 법칙이 없었다면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앞선 현자들이 남긴 지적 자산을 토대로 자신들의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지식의 축적이란 그래서 소중하고 중요하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앞선 사람은 지식을 어떻게 후손에 전할 수 있었을까? 문자 혹은 글자 덕분이다. 글자가 있었기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 기록을 읽고 배운 후배들이 다시 그 위에 지식을 쌓아 올렸다. 이렇게 축적된 방대한 지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우리는 이 덕분에 고대 그리스 현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각자들이 축적한 위대한 문화유산을 계승할 수도 있다.
만일 문자가 없었고, 그것을 발전한 글자가 없었다면 인류는 여전히 원시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도돌이표처럼 했던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선조들의 말로 전해주는 지식이나 지혜는 불완전하고 왜곡되기 쉽다. 시간이 흘러 잊히는 것도 많다. 몇 대가 내려가면 선조들이 전하려는 지식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러니 후손들은 늘 새로 시작하고, 선조들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문자가 없었다면 지식을 축적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킬 만한 역량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최초의 문자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자의 기원으로 이집트의 상형문자(象形文字), 중국의 갑골문자(甲骨文字),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楔形文字)를 든다. 이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현재의 글자로 발전했다. 어느 문자가 현재 어느 글자인지 구분하는 것은 이 글의 본질이 아니라 생략한다.
문자가 발명됨으로써 사람은 지혜나 지식, 감정을 남길 수 있었다. 인간의 지식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전파되기 시작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선조들의 삶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문자 덕분이다. 수메르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고대 그리스 문명, 고대 중국 문명 등 이루 셀 수 없는 많은 고대 문명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것은 글자 덕분이다.
문자 혹은 글자의 발명은 인류의 발전을 위대한 첫걸음이다. 필자는 문자의 발명을 인류의 1차 지식혁명이라 생각한다. 농업 혁명, 산업혁명, 정보화 혁명은 기술과 산업 구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구분이다. 신기술의 발명은 산업구조를 뿌리째 변화시켰기에 혁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인류는 몇 차례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필자는 그러한 산업구조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이 지식혁명이라 판단한다.
인류는 지금까지 세 번 지식혁명을 경험했다고 본다. 문자의 발명이 첫 번째 지식혁명이고, 중세 말의 인쇄술의 발달이 두 번째 지식혁명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지식혁명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 기반 인터넷 기술이 불러온 것이다. 이 세 번의 지식혁명은 지식의 축적과 전파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류는 문자를 이용해 지식을 차곡차곡 축적해왔다. 지식혁명은 축적된 지식을 더 빠르게 전파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문자의 발명이 지식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면, 인쇄술은 축적한 지식을 널리 보급했다. 인터넷은 전파 속도와 지식의 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이들 지식혁명이 없었다면 인류는 여전히 진리를 찾기 위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대학의 탄생
이처럼 문자는 지식을 축적하게 했고, 지식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었다. 지식을 많이 깨친 사람들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지식을 가르쳤다. 기원전 387년 무렵,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설립했다. 그는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대학의 기원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 말하는 대학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다. 당시 그리스 사회가 원하는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교육기관이다. 말하자면 상징적 의미에서 대학이라 해도 학과 혹은 전공과목 개념의 대학은 아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이 어딘가? 몇 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중세 시절에 유행했던 성당 부속 교육기관이나 사설 교육기관은 고등교육기관의 체제를 완비하지 못했다. 중세 중기가 되면 황제의 지원을 받아 국가에서 직접 대학을 설립한다. 이곳에서는 법학과 철학 등의 고등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했다. 왕실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을 대학의 시초라 보는 주장도 있다.
425년 동로마 제국이 설립한 콘스탄니노폴리스 대학을 세계 최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다른 왕권 국가에서 설립한 고등교육기관도 많다. 국가 혹은 왕실 주도의 교육기관은 고대 로마나 고대 그리스, 이슬람 문화권과 동양에도 존재했다. 우리나라만 해도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에 국가 교육기관 태학(太學)이 설립되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 이유는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고등교육기관의 체계를 갖추었는가에 대한 시각 차이 때문이다. 설립 시기와 왕실 지원 여부만 따지면 대학의 시초를 구분하기 쉽지 않다. 볼로냐 대학교(1088년), 알 카라윈 대학(85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425년), 날란다 대학(5~7세기경), 고구려의 태학(372년)도 그 대상에 속한다. 어쩌면 372년에 세워진 고구려의 태학이 '세계 최초의 대학'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계 최초의 대학을 설립 연도와 국가 교육기관이냐의 여부로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나라마다 왕조 국가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고등교육기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대학(university)의 체계와 개념을 갖고 있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지금까지 대학이 현존하고 있는지, 또 학위와 학과라는 조직 명칭을 갖추었는지도 중요하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이탈리의 볼로냐 대학을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대학의 영어 단어 University를 공식적으로 최초로 사용한 것은 이탈리의 볼로냐 대학이다. 볼로냐 대학(University of Bologna)의 문양에는 대학의 공식 명칭인 Alma Mater Studiorum Universita di Bologna이 새겨져 있다. 이 대학은 11세기 로마법의 권위자인 이르네리우스(Irnerius, 1050~1125)가 1088년 법학부를 개설했다. 그 후 115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1122~1190)가 볼로냐 대학에 각종 특권을 부여하는 특허장을 부여했다. 대학과 유사한 교육기관은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지만 그중 현재까지 내려오는 '대학'의 개념을 규정하고 원류가 된 것은 볼로냐 대학교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대학이다.
볼로냐 대학의 설립 연도가 1088년이냐, 1159년이냐에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어느 해를 기준으로 해도 세계 최초의 대학이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황제의 특허장에 따르면, 볼로냐 대학의 교수와 주교 말고는 누구도 볼로냐 대학생들을 재판할 수 없는 사법적 특권을 부여받았다. 채무를 변제받을 목적으로 학생을 강제로 구금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지 못하도록 했다. 볼로냐 대학의 학생들은 공식적으로 당시로는 파격적인 특권을 부여받았다.
대학이 설립되자 학생들이 몰려와 도시가 성장했다. 이것을 목격한 유럽의 도시들은 대학을 설립하기 시작했고, 그 뒤부터 이탈리아, 파리 등 여러 도시에서 대학이 설립되었다. 중세 대학의 전성기이자 영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대학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자치도시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대학은 법적, 경제적 ‘자치권’을 가졌고, 교회법이나 국법에 구속되지 않는 재판권을 가졌다. 이 시기의 대학은 역사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