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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Dec 12. 2022

<재벌집 막내아들> 자본주의는 원래 그렇다.

그렇게 뿌렸다는 돈을 본 적도 없는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고 있다. 5화까지 봤는데 재미있다. 어느 재벌 이야기인지는 쉽게 짐작 간다. 그들만의 리그를 엿볼 수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감히 쳐다보지 못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흥미진진하다. 드라마를 직접 봐야 이야기가 더 박진감 넘칠 것이니, 스토리 소개는 생략한다. 하긴 나도 아직 다 보지 않은 터라 어떻게 전개되는지 모른다.


온갖 모욕을 참으며 회사를 위해 헌신하는 주인공이 안쓰럽다. 그는 재벌의 충복으로 살다가 재벌 내 권력 다툼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는다. 처절하게 찢기고 버림받는 주인공의 모습에 돈도, 인맥도 없는 서민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그런 그가 재벌가 막내아들로 환생해 자신을 죽인 재벌을 향해 복수해 나가는 장면이 통쾌하다. 고약한 심보인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대리만족한다. 참고로 주인공으로 나오는 텔런트 송준기가 재벌집 막내아들로 참 잘 어울린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상식이 된 지 오래다. 늘 그렇듯 상황이 나빠지면 약한 고리부터 터진다.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빈약한 사람은 피골이 상접해진다. 코로나19에 따른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엄청나게 뿌려댄 돈이 문제가 되고 있다. 돈은 늘 자기들끼리만 노는 습성이 있는가 보다. 가난한 동네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너무 돈이 많이 돌아다니니 문제라면서 돈줄을 옥죄기 시작한다. 지천으로 뿌려진 돈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니 문제라고 한다. 마구잡이로 살포할 때는 언제고 다시 돈줄을 꽉 움켜쥔다. 그 상황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지만, 너무 형평에 어긋난다. 돈을 고리로 움직이던 경제가 ‘동작 그만!!’이라는 지시받았다. 이자율은 나날이 높아지고 경기는 얼어붙고 있다.

      

곳간에 돈을 쟁여 놓은 사람들이야 걱정할 바 하나 없다. 돈은 목을 죄면 죄는 대로, 풀면 푸는 대로 늘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오히려 목줄을 죌수록 그들끼리만 더 자주 연회를 연다. 드디어 그들의 진가를 보여준다는 자부심에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다. 너무 많은 돈이 돌아다닐 때는 사실 자기들의 뽀대가 나지 않아 내심 불만이었다. 이제 옥석이 가려진다고 속으로 손뼉 치며 흥에 겨워 난리다.           


정작 서민들은 그 많은 돈을 구경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돈이 많이 풀렸다는데 다 어디로 간 걸까?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는가, 아니면 땅이 꺼지듯 돈이 사라지는 싱크홀이라도 있는 걸까? 도대체 돈의 낯짝도 제대로 본 적 없는데, 돈이 많이 돌아다녀 문제라고 하니 난감하다.      

   

돈줄을 죄기 시작하니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힘들다. 준비하려 해도 뭐가 있어야 준비하지 참 얄궂은 일이 벌어졌다. 돈이 돌지 않으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다. 사람들의 주머니가 얇아지니 지갑을 열지 않는다. 돈을 써야 할 서민들도 사정이 넉넉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딨나. 먹고 죽으려 해도 없던 돈들이 어디에 그리도 많이 풀렸을까. 지천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정작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거리에서도, 집에서도 그들을 만난 기억이 아득하다. 돈이 넘칠 때의 기쁨은 부자들 차지고, 돈이 사라질 때의 고통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가뭄에 바싹 마른 천수답 논을 쳐다보며 하늘을 원망하던 농부의 심정이 된다.         

  

문제는 큰손이, 혜택도 큰손이

세계 경제는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라는 초대형 악재를 만났다. 1970년대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안겨준 스태그플레이션의 악몽이 재현되고 있다. 어떤 사람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된다. 물가가 폭등하면 자산 가치는 크게 상승한다.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게 되는 호기를 만난 셈이다. 월급에만 의존하는 직장인들의 삶이 더 팍팍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한 발 앞이 낭떠러지라 위험천만하다. 몇 차례의 금융위기와 경제 위기는 중산층을 빈곤층으로 내몰았다. 부의 세습과 대물림이 흔한 일이 된 지 오래다. 여기 동참하지 못하는 이들은 가난을 물려준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소시민의 삶은 애잔하다.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동면하는 곰처럼 불필요한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혹한의 겨울을 견뎌야 한다.           


호경기의 기쁨은 부자가 더 많이 갖고, 불경기의 고통은 빈자가 더 많이 갖는다. 2008년 미국 월 스트리트 금융자본가들이 일으킨 위기가 세계 경제를 강타했다. 월가의 탐욕이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라는 위험 금융 상품을 남발하는 바람에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그 결과 많은 중산층이 몰락하고, 서민들은 집을 뺏기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정작 문제를 일으킨 월가의 금융자본가들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구제금융이라는 미명으로 뿌려진 달러로 돈을 더 많이 벌었다. 비극이 희극보다 더 희극적인 상황이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엎은 난리 블루스를 치고도 정작 책임을 지거나 처벌받은 금융자본가는 없다. 역시 부는 부자의 것이고, 가난과 고통은 빈자의 못이라는 말이 다시 입증된 셈이다. 그 당시 구제금융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뿌려진 그 돈들이 이번 위기에 크게 한몫 거들고 있다.     


자본주의는 원래 그렇다?

사회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하고 있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빵집이 있었다. 어느 순간 빵집 아저씨의 멋있는 구레나룻을 볼 수 없게 됐다. 대신 그 자리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떡하니 들어섰다. 해사한 얼굴을 한 여주인이 친절한 미소로 나를 맞는다. 어느새 우리는 그 분위기에 젖는다. 매장이 깨끗하다, 프랑스식 빵 맛이다, 편리하다는 둥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우리 발길도 그곳으로 향한다.     

    

프랜차이즈 빵집을 굳이 부의 대열에 넣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프랜차이즈 본사 이야기다. 그들은 막강한 자본력으로 동네 빵집의 씨를 말렸다. 대형 자본 앞에 무기력해진 동네 빵집 주인들은 눈물겹게 버티다가 끝내 손을 든다. 자본주의는 원래 그렇다고 말하면 더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빈익빈 부익부’의 슬픔은 감출 수 없다.      


대학도 ‘빈익빈 부익부’의 덫에 걸렸다. 학생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취업이 잘 되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곳으로 학생이 몰린다. 그걸 탓할 수도 없고, 탓할 이유도 없다. 누구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높은 의식과 가치관을 추구하는 학문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전공이 돈을 최고로 치는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뒷전으로 밀려났다. 고결한 이상과 순결한 영혼을 탐구하는 학문이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인문학을 공부해도 경제적 궁핍에 내몰리지만 않는다면, 정신적 가치를 고양하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랬다면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 나타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완화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효율성 원리가 상아탑을 차지한 지도 오래됐다. 자유와 진리를 논하던 대학이 이제는 경제와 자본의 효율성을 따지고 있다. 철학이 죽고, 문학이 죽고 오직 돈 되는 학문만 살아남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건강한 비판 속에 건강한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는 원래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돈은 돈이 되는 곳으로만 흐르기 마련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리마저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자본의 논리다. 그러니 누굴 탓하겠는가. 자본의 흐름에 순응하고 따라가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영구불멸의 진리가 아니라는 볼멘소리도 있다. 자본주의라는 것도 알고 보면 사람이 만든 제도인데, 어찌 그것이 진리가 되겠느냐는 반박도 있다.           


과거에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에서부터 수많은 철학자와 이론가들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한계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비판했다. 최근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Thomas Piketty)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자산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지면서 소득 불평등 역시 점점 심화한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세습” 자본주의가 부(富)와 소득의 “끔찍한” 불평등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자본주의가 절대 진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에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보완을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외면할 필요는 없다.           


다음 브런치에 올릴 글은 순서상 나이 도둑인 “텔로미어‘ 이야기다. 그리고 난 후 대학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그다음에는 이 글의 후속 편으로 자본주의 안에서 싹을 틔우고 있다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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