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됐다.
나이 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받아들이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싫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마음은 편하다. 거부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나이를 먹는 일이다. 천하를 발아래 놓고 세상 좁다고 큰소리친 영웅과 호걸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천재나 석학들도 나이 드는 것을 아쉬워했다. 사람이 나이 드는 건 이리도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가 나이 드는 것을 서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영원하지 않고, 인생이 찰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다르다. 현자들은 일생을 한 조각 뜬구름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지는 시간쯤으로 여긴다. 인간은 100년 남짓한 삶을 길다고 여길 수 있지만, 말년에 가면 다들 짧다고 말한다. 그건 뒤늦은 회한일 뿐이다. 현자는 인생이 유한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나이 드는 것을 후회하거나 서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통 사람인 우리로서는 뒤늦게 후회할 공산이 크다. 어차피 모두 흙으로 돌아갈 걸 알면서도 아등바등 산다. 겸허한 마음으로 성실히 사는 게 아니라 욕심에 찌들어 아귀다툼한다. 그러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문득 뒤돌아보며 탄식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재미있게 살 것을. 옛날로 돌아가면 느긋하게 마음을 비우고 즐겁게 살 거라는 의미 없는 생각도 해본다. 이미 흘러간 세월인데 뭐 어찌할까.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죽는다. 죽음을 거부하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불로초를 구한다거나, 회춘의 명약을 찾아 헤맨 사람도 많다. 가는 세월을 억지도 동여매려 한들, 싫다고 손사래를 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젊을 때야 나이 듦이 자신과 관련이 없는 걸로 착각한다. 정작 나이 들어서야 그걸 깨닫는다. 그럴 줄 모르는 젊음도 문제지만 그렇게 된 걸 후회하는 노년도 문제다.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쓴 자기 무덤의 묘비명이 촌철살인이다. 너무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원문과 번역문을 동시에 소개한다. 널리 알려진 번역문보다 원문을 읽는 것이 버나드 쇼의 생각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보통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많이 알고 있다. 누가 번역했는지 모르지만, 입에 착 감기는 게 감칠맛이 난다. 딱딱하지만, 원문에 조금 더 충실해 보자. “충분히 오래 살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걸 나는 알았다.”라는 뜻이 될 것이다. 오래 살면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이만큼 살면 됐다는 걸 담담하게 말한다. 죽음조차 쉽고도 간결하지만, 함축적으로 표현한 그의 재치와 담담함이 부럽다.
불로장생의 열망
나이 듦과 관련한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신화와 역사 속 인물 그리고 영화 이야기다. 각기 다른 상황이지만, 나이 들고 죽는 것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장대한 영웅 이야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으로 반신(半神)인 길가메시(기원전 2600년경으로 추정)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작품이다. 기원전 2750년경에 실재했던 우루크의 왕인 길가메시의 신화를 하나의 장대한 서사시로 묶었다.
몸의 3분의 1은 인간, 3분의 2는 신(神) 길가메시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멸의 비결을 찾아 나섰다. 그는 긴 여정의 끝에서 아쉽게도 불멸의 비결을 놓치고 만다. 다시 우루크로 돌아온다. 그는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웠던 진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 210)는 나이가 들고 죽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는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신하들을 닦달했다. 신하의 명으로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불로초를 찾아 동쪽으로 길을 나섰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의 제주도까지 왔지만 끝내 불로초를 찾지 못했다. 서불은 바닷가 포구를 통해 서쪽인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포구에서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서귀포(西歸浦)의 유래라는 말이 있다.
진시황제는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불로불사의 비법이라 전해오던 수은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역설적인지만, 그가 마신 수은이 오히려 그의 명을 재촉했다. 오래 살려고 한 노력이 더 일찍 죽게 만든 것이다. 병마총이라는 거대한 무덤을 만든 것도 사후에 다시 살아나겠다는 그의 열망이 담겼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그의 열망도 헛되이 끝났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뉴올리언스. 80세의 외모를 가진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버튼이다. 태어날 때부터 노인의 얼굴이라 양로원에 버려져 노인들과 함께 지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지는 특이한 유전자를 가졌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늙지만, 벤자민은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젊어진다.
벤자민이 12살이 되자 80대에서 60대로 외모가 조금 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5살 소녀 데이지를 만난다. 그는 데이지의 푸른 눈동자를 잊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벤자민은 거꾸로 젊어져 중년이 된다. 세상으로 나간 벤자민은 숙녀가 된 데이지와 만난다. 몇 번의 엇갈림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둘이 얼추 비슷한 나이가 됐을 때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다. 벤자민은 날마다 젊어지고 데이지는 점점 늙어간다.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으로 출현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의 줄거리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미국 소설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1925)>의 작가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원작은 1922년 피츠제럴드의 두 번째 단편집 <재즈시대 이야기>에 들어있다. 현실에서는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고, 거꾸로 가지도 않는다.
누가 나이를 훔쳐가는가.
인간인 이상 누구나 노화를 경험한다. 나이가 들면서 몸의 근육량이 감소하고 균형 유지 능력이 떨어진다. 인지 능력도 저하하고 시력도 나빠지는 등의 신체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노화 현상이 진행되는 동안, 스트레스에 노출되거나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 노화의 속도는 빨라진다. 반대로, 노화에 따른 신체적 변화를 최소화하고 질병이나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 노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젊을 때는 피부가 팽팽하고 얼굴에도 주름이 없다. 체력도 좋고 웬만한 피로도 하룻밤 자고 나면 거뜬히 회복한다. 밥을 먹으면 금방 소화하고 무릎이 아프거나 하는 일도 없다. 관절도 튼튼하고 위도 튼튼하다. 신체의 모든 기관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제 기능을 잘 수행한다. 몸 안의 수명을 다한 세포는 금방 새로운 세포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영원히 그렇게만 되면 좋은데 우리 몸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체기능은 떨어진다. 피부의 탄력도 없어지고 체력도 옛날 같지 않다. 밥을 먹어도 잘 소화하지 못하고, 무릎도 자주 욱신거린다. 몸의 세포가 활발하게 세대교체를 해야 하는데, 그 기능이 떨어진 것이다. 세포가 새로운 세포를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신체적 변화를 우리는 노화(老化, ageing)라고 부른다. 우리의 나이를 훔치는 도둑은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 세포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노화는 시작 시기, 속도와 범위가 개인에 따라 다르다. 또 단기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꽤 긴 시간 일어난다. 유전, 환경, 생활양식, 영양 섭취 등이 노화에 영향을 미친다. 노화는 진행 속도가 느리고, 생활 습관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기능을 위축시킨다. 이처럼 노화란 오랫동안 잘 분열하던 세포가 분열하는 기능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왜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할 수 없을까? 다른 말로 하면 노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노화에 관하여 여러 가지 생물학적 이론이 있다. 자유라디칼 이론, 텔로미어 이론, 미토콘드리아 이론, 교차결합 이론, 당화반응 이론, DNA 손상 이론, 신경내분비 이론, 면역 이론이 그 예이다. 이 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원인도 있을 수 있다. 그만큼 노화의 원인이 복잡하다는 뜻이다.
이 많은 이론을 우리가 알 필요는 없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이론을 하나 알아보자. 최근 세포의 끝부분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면 세포의 기능이 퇴화한다는 텔로미어 이론이 각광받고 있다. 다음 글에서 텔로미어를 이야기해보자.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이 나이 듦의 주범이라고 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