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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Dec 26. 2022

파도를 봤을 뿐, 바람을 보지 못했다.

파도와 바람 1

파도를 봤을 뿐, 바람을 보지 못했다.

"어이 관상가 양반,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정재)이 천재 관상가 김내경(송강호)에게 묻는다. 2013년 개봉하여 약 913만 명을 동원한 영화 <관상>의 명장면이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왕이 될 상인지 아닌지를 맞히면 김내경의 아들 진형(이종석)을 살려주기로 약속한다. 김내경은 아들을 살리려는 절박한 마음에서 떨면서 수양대군이 왕이 될 상이라고 말한다.



사진 출처 : 나무 위키


"헌대, 관상가 양반, 이거 영 이상하구먼. 나는 이미 왕이 되었는데 왕이 될 상이라니? 이거 순 엉터리 아닌가?"    


김내경의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말의 머리를 돌린다. 그리고 김내경의 아들 진형을 활로 쏘아 죽인다. 김내경은 아들의 죽음을 부여안고 통곡한다.               


"나는 파도를 봤을 뿐이다. 파도를 밀치는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결국 바람을 보지 못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제주도에 내려온 김내경은 말한다. 천재 관상가로 칭송받지만 정작 자기 아들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한 아버지의 비통함이 절절하다.               


영화에서 천재 관상가가 김내경이 수양대군의 역모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의 뜻은 좌절하고 오히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된다. 어디까지나 감독의 상상력이 만든 재밌는 이야기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바람이 운명을 가른 계유년의 밤     

달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다. 며칠 지나면 휘영청 달 밝은 보름이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당한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조선 6대 왕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뺏기 위한 목숨 건 싸움을 일으켰다. 1453년(단종 1년) 계유년(癸酉年) 음력 10월 10일 밤부터 시작된 정난(靖難), 즉 계유년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이 수양대군의 칼날 아래 이슬처럼 사라졌다.             


당시 어린 왕 단종을 보필하는 인물로 김종서와 황보인이 있었다. 김종서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용맹함과 충성심을 자랑했다. 멀리 함경도의 끝자락에서 수많은 오랑캐를 물리친 불세출의 장군이다. 그는 왕의 신임과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단 한 사람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수양대군을 빼고 말이다. 수양대군 눈에 김종서는 결코 동행할 수 없는 숙명의 정적이자 눈 안의 가시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왕위를 찬탈할 수 없음을 알았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밤, 수양대군은 단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김종서의 집을 찾았다. 이날 밤은 보름도 아닌데, 사람의 수염을 셀 정도로 달빛이 밝았다. 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시자는 김종서의 권유를 마다한 수양대군은 서찰을 건넨다. 누군가 역모를 꾀하는 내용의 서찰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편지의 내용과 김종서의 죽음에 관한 세부 내용은 역사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어쨌든 순간의 방심이 비극을 불렀다. 역모라는 말에 김종서는 당황했다. 왕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반역 행위가 있다는 소리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경계가 흐트러졌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서찰을 밝은 달빛에 비춰 보았다. 그 순간 수양대군이 데려온 부하의 철퇴가 허공을 가르며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는 손 한 번 못 쓰고 허무하게 죽었다. 조선의 왕권이 수양대군의 손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순간이다.               


그날 밤, 달빛이 흐렸다면 김종서가 마당에서 수양대군의 서찰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긴장의 끈도 놓치지 않고, 허망하게 당할 일도 없었다. 거사를 결심한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한판 대결이 벌어졌을 것이다. 피가 튀고 선혈이 낭자한 비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치열한 싸움이다. 그날 밤 불어온 바람이 운명의 흐름을 바꿨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난이 실패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역사의 큰 물줄기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느리거나 혹은 조금 빠르게 흐르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흘러가는 방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은 왕으로 이어지다 조선의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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