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기차를 기다리는 밤은 시리고
사람들은 긴 하루를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밤
나는 순례자처럼 길을 떠난다
먼 남쪽 지방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린 작은 도시
서울행 열차를 타려면
이곳에서 다시 인근 도시로 가야 한다.
고즈넉한 시골 간이역의 저녁
역사 맞은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층 낮은 아파트가 서 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저녁노을
야금야금 진격하는 어둠
이내 세상은 온통 짙은 어둠 천지다.
밤은 검은 휘장을 펄럭이며 마을과 역사를 뒤덮었다.
역사의 키 큰 가로등 불빛은 어둠을 밀어내고
까만 밤의 캔버스에 흰 동심원을 그려.
불빛 밖으로 밀려난 어둠은
왈칵 칠흑 눈물을 쏟아내.
시린 바람에 종종걸음 걷는 사람들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뒷모습
긴 하루 보낸 이들을 맞느라
창문마다 하나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따뜻한 온기를 지피면
나는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지.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열차의 불빛을 가로막는 짙은 눈발
오늘따라 열차가 늦어진다는 안내 방송에
서울행 열차를 놓칠까 봐 급해진 마음
간이역 벤치에 앉아 올려본 하늘에는
성긴 별이 드문 빛나고
이미 길 떠난 사람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고
시린 겨울바람만 어둠과 티격태격하는 시간
“열차를 놓치면 어떡하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조바심을 내지만
기다려도 열차는 오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어찌 되겠지 하고 마음의 끈을 놓는다.
영락없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매섭고 독한 겨울밤을 맞는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고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인다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이 떠오르고
LED 조명이 환하게 불을 밝히는 역사가
못내 민망해 어둠 속 벤치에 앉아
좀처럼 오지 않은 기차를 기다린다.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도 없고
톱밥 난도로 사라진 지 아득한 이곳에서
한참을 더 기다렸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는 기차
서둘러 오르니
늦은 기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냅다 쏜살 같이 달린다.
마음 졸인 탓일까?
유난히 길고 시린 겨울밤
미끄러지는 열차 뒤로 고독을 남겨 두고
다시 길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