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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Dec 29. 2022

넌 이름이 뭐니?


애꿎은 마스크를 탓하며

“넌 이름이 뭐니?”

“저 상준인데요”

“이런 미안하다. 마스크 벗으니 영 몰라보겠구나”

“괜찮아요!!”     


성적도 다 처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몇몇 학생과 간단한 점심 자리를 마련했다. 평소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과 일에도 적극적인 학생들이라 밥을 사기로 했다. 조금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다들 밥을 먹느라 마스크를 벗고 있었다. 낯선 학생들의 모습에 당황했다. 마스크를 벗으니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났다.       


맙소사!! 이럴 때 쓰는 표현일까. 그중 유난히 상준이의 얼굴이 내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만 봤을 때는 터프하게 보였는데 곱상한 미소년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름이 뭐냐고 물어본 것이다. 1년 가까이 가까이 지켜보며 친하게 지냈던 친구라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마스크를 탓하며 겸연쩍은 분위기를 넘겼다.      


웬만하면 개학하고 한 달쯤이면 학생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한다. 자주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주다 보면 얼굴을 익히기 쉽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자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차리기 힘들어졌다. 얼굴의 특징이나 윤곽을 알아야 이름과 매칭하는데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덩달아 내 기억 능력도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에 벌어진 아쉬운 일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식별하고 외부의 정보를 판단할 때 눈의 역할이 80%를 넘는다. 귀, 코, 입, 손과 발 등 다른 신체 감각기관을 통틀어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 눈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면, 사람 얼굴을 제대로 알아차리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다. 눈은 제 기능을 하는데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버리면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눈뜬장님이나 다를 바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2002, 해냄출판사)는 눈이 멀쩡하다 갑자기 사람들의 눈이 멀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 도시 전체에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퍼진다. 정부는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하고, 격리 장소를 벗어나는 사람을 사살한다. 도시 전체에 질병이 급속히 전파되어 병원의 수용 능력도 한계에 도달한다. 병원이 통제 능력을 상실하자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본성이 드러났다. 성폭행, 폭력, 방화 등 온갖 범죄가 벌어지고, 사람들은 원초적인 욕망을 표출한다.     


급기야 전염병은 도시를 장악한다. 도시 전체는 눈먼 자들이 배출하는 쓰레기, 배설물로 넘쳐난다. 짐승들은 병들어 죽은 사람을 뜯어먹는 지옥이 연출된다. 눈에 보이던 사람과 도시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인간 본성의 추악한 모습을 감춘 추억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는 평소 눈으로 보는 것은 사람과 사물의 겉모습이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소설 속에서 단 한 사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은 악다구니로 가득한 현실을 목격한다. 그녀는 폭력이 난무하는 지옥 같은 현장에서 눈먼 사람들을 보호한다. 그녀는 책임감을 갖고 헌신하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과 함께한다. 눈먼 사람들이 서로 미움과 증오를 벗어던지고, 참다운 인간미를 느낀다. 서로를 위로하며 타인과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깨닫게 된다. 신기하게도 그때 비로소 질병에서 벗어나 차례로 눈을 뜨게 된다.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평소 눈에 비치는 이미지가 사람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가 아니라 그 내면에 자리한 본모습을 이해할 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을 중심으로 서로를 위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보이자 사람들의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순간 질병을 이겨내고 사회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름을 부르고 싶다. 

다행히 마스크 쓰는 사회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낯선 풍경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 얼굴을 온전히 볼 수 없기에 그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없다. 외모로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게 된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힘들다.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도 또 만나면 새삼스럽다. 그러니 정이 들 겨를이 없고, 만날 때마다 낯선 사람이 된다.      


내년에는 마스크를 벗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오래지 않아 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다 만나면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가물거리는 내 기억을 재생해고 싶다. 이름을 불러둔다는 것의 느낌은 일찍이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서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고 했다.  

   

서로가 이름을 불러줄 때 눈짓이고 의미가 될 수 있다. 이름을 부를 수 없다면, 날마다 그들은 낯선 얼굴로 다가올 것이다. 빨리 코로나19를 퇴치하고 마스크를 벗어던질 날을 기대한다. 이미지에만 매몰되지 않는다면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더 정겹다. 올해는 어쩔 수 없지만, 새해에는 얼굴을 보고 서로의 내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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