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은 자유고 망상은 해수욕장이다.
사람은 얼마 만에 사람이나 사물의 첫인상을 결정할까? 0.1초와 12분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주장을 살펴보자. 남의 주장을 인용할 일이 있으면 실제 그런 말을 했는지 원전을 찾아 꼭 확인한다. 그래야 글의 신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두 개의 주장이 실린 책이나 논문을 찾아봤다. 아무리 뒤져도 주장만 나오고 원전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꽤 권위 있는 사람의 신문 칼럼과 방송에 소개된 내용을 재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먼저 미국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자닌 윌리스의 주장이다. 그는 70명의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사람을 보여주고 호감도와 매력도를 평가하게 했다. 그랬더니 77%의 사람이 0.1만에 첫인상을 결정했다. 직접 만나지 않고 사진만 보고 호감도를 평가한 실험이다. 사진의 얼굴 생김새만 보고 호감과 비호감이 나눠진다면, 뽀샵 처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어쨌든 잘 생기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참 낭패도 이런 낭패도 없다.
그렇다고 벌써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영국의 심리학자 도나 도슨 박사는 2,000명을 대상으로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눈 후 12분이 지나야 첫인상을 결정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호감을 느끼게 되는 데는 0.1초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장점을 더 많이 살필 기회가 있다.
따지고 보면 12분은 0.1초보다 낫지만, 한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절대 긴 시간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사람이나 대상을 본 느낌을 결정하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나도 화실의 첫인상을 결정하는데 데 그리 오랜 시간이 안 걸린 걸 보니 주장이 맞는 모양이다. 사람이 많지 않아 차분한 화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의 조곤조곤한 설명도 귀에 쏙 들어와서 좋다. 그렇게 화실과 만나 첫 배움이 시작되었다.
화요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 일주일에 두 번 화실에 가기로 했다. 주말 페이펄 문구점에 가서 그림 도구를 샀다. 가지런히 정리된 그림 도구들이 내 손길을 기다린다. 몽땅 다 사고 싶지만, 이거 뭐 한도 끝도 없다. 마치 옷 가게에 들렀더니 마음에 드는 옷이 한두 개가 아닐 때 느꼈던 기분이 든다. 생각 같아서야 가능한 많은 종류의 화구를 사고 싶었지만,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라 당장 필요한 것만 구매하기로 했다.
우선 톰보 2B와 4B 연필과 스테들러 HB와 2B 연필을 각 한 다스씩 샀다. 캔손 스케치북 한 권과 지우개도 넉넉하게 장만했다. 그림 도구를 파는 문구점이라 색깔도 다채롭고 앙증맞은 제품인 눈에 밟힌다. 생각 같아서는 더 많은 것을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쥐뿔 아는 것도 없으니 참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뭔가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기분은 좋다. 언제나 시작은 씩씩하고 거침이 없는 법이니 당장이라도 근사한 스케치를 뽑을 것 같아 자신감이 넘친다.
'착각은 자유고 망상은 해수욕장이다'라고 했던가. 강원도 삼척 묵호항에서 3킬로 더 북쪽으로 가면 아름다운 바닷가가 나온다. 그곳에 망상해수욕장이라 있다고 하니 멀기도 한참 멀다. 내 현실과 꿈꾸는 그림 실력 사이의 거리만큼 멀어도 너무 멀다. 그렇지만 착각 속에서 행복하다면 그것도 가히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새롭게 도전할 수 없다. 그림 그리는 일은 재능이 특출하거나 뛰어난 화가들이나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착각이 없다면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첫 시작과 느림의 미학
어느덧 화요일 저녁이다. 가는 길의 스타벅스에 들러 제일 큰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로 선생님 것과 두 잔을 샀다. 워낙 커피를 좋아하는 탓에 큰 사이즈라도 금방 동이 난다. 한 손에는 커피도 들었겠다 걸음걸이도 힘차게 화실 문을 열었다. 저녁 7시에 맞춰 들어가니 선생님과 여성 한 분이 막 그림을 시작한 모양이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첫날이라 간단한 커피 타임을 가졌다. 포부는 크고 희망은 거창하지만, 초보자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소박한 뜻을 밝히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다.
드디어 연필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선생님이 그림 배우는 순서를 말한다.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는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선 긋기 연습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명암을 넣고 드로잉을 한다. 이 시기가 더디고 단조로워 사람들이 지겨워 한다. 인내를 갖고 오랜 시간 연습해야 나중에 그림 그리는 데 큰 효과를 본다. 기본기가 충분히 갖춰지면 다른 사람의 그림을 많이 베끼는 것이 좋다. 모작이 자기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밑천이 된다. 그런 순서로 꾸준히 연습해서 그림 실력을 쌓는 게 좋다는 이야기다.
그때는 그 말들이 사실 제대로 실감 나질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 그 느낌이 어떨지 알 수 없다. 그렇겠거니 하면서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지금에서 생각하면 기초를 다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낀다. 그때 더 많은 시간을 선 긋기에 투자하고, 더 많은 시간을 드로잉 하는 데 몰입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온다. 도로잉 실력이 탄탄하면 스쳐 지나는 풍경도 빠르게 스케치할 수 있다. 그 위에 찬찬히 자기 생각을 덧씌우면 좋은 그림이 될 것이다.
사실 누구나 미술 시간에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두 번 그려보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그때부터 그림과 멀어진다. 연습을 전혀 하지 않고 무작정 그리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리는 일에 흥미를 잃고 관심도 사라진다.
"그래. 원래 그림은 재능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맞아, 제는 원래부터 재능을 타고난 거야!!"
그림과 점차 담을 쌓은 어린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노력하기 싫을 때 제일 좋은 핑곗거리는 재능을 들먹이는 일이다. 타고난 재능이 없어서 포기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쉽게 반박할 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재능 없음을 탓하는 것은 노력하기 싫다는 말과 다름이 아닌 경우도 많다.
곰곰이 생각하니 그림 그리기는 몇 년 동안 꾸준히 배우고 연습하면서 습득해야 하는 실력이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보낸 긴 세월을 생각하면 일반인들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정도 봐줄 만한 그림이 나온다. 걸작을 남기는 것은 충분한 실력과 그리는 이의 천재성과 재능이 담겨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이야 거기까지는 꿈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렇지만 제대로 노력만 하면 자기 내면의 힐링을 위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분명히 이런 단단한 각오로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 마음이 왜 오래가지 않을까. 더디게 가도 성실하면 그 길이 오히려 더 빠르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이 인내와 느림을 참지 못한다. 더딘 것이 더 아름다운 결실을 보는 느림의 미학을 잊는다. 선 긋기와 드로잉 연습보다 색칠에 눈길이 가는 순간 얕은 그림 솜씨에 빠져든다. 아쉽지만 뒤늦게나마 깨달았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