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더디고, 부엉이는 황혼에 날갯짓한다.
화요일과 금요일은 화실 가는 날로 정했다. 약속도 잡지 않고 그림 배우는 데 전념했다. 드물게 금요일 가지 못하면 날짜를 조정해서 토요일 아침에 갔다. 토요일은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이 많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신기하게도 여자아이들만 그림을 그린다. 남자아이들은 태권도 도장이나 운동 배우로 간 건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한 달의 기록을 읽어보면 늘 각오가 난무한다. 무지하게 연습하겠다거나 틈만 나면 드로잉 하겠다는 둥 이런저런 다짐으로 넘친다. 지금에서 그때를 되돌아보니 우습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이제는 무엇이 잘 됐고 무엇이 잘 못 됐는지 어렴풋하게라도 알지만, 그때는 그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지금 아는 걸 그때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진짜 지금 아는 걸 그때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그걸 알 정도로 내가 지혜로웠다면 지금이라도 그걸 실천하면 된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걸 제대로 알긴 알기나 한 것일까. 미리 알고 해야 했는데, 늘 지나고 나서야 후회한다. 삶이 원래 그런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개를 편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그의 저서 『법철학 강요』 서문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깨침은 늘 늦고 벌써 날은 저문다. 깊은 밤에 깨치면 갈 곳 없고 쓸 데도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해지기 전에 깨치고, 지혜를 잘 활용한다. 나처럼 모자라는 사람을 늘 뒷북을 친다. 내가 깨닫는 순간, 지혜는 이미 저만치 달아났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을 말하고. 황혼은 늦은 시간을 말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한창 일이 진행되는 한낮을 보내고 일의 끝 무렵인 밤이 되어야 날개를 편다. 이 말은 지혜와 깨달음은 일이 끝날 때쯤에야 보인다는 뜻이다. 일이 진행할 그때 세상의 진리나 이치를 알고 대비해야 한다. 일이 마무리된 뒤에 지혜를 알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 내가 아는 걸 그때 알았다면 달라질까?
안타깝지만 지혜의 늦은 깨달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갖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으니 얼마나 신날까? 인생에서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지만, 정작 무엇이 기회였고, 어떤 것이 기회였는지는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린다. 아 그때 그걸 해야 했는데, 그때 그곳에 투자해야 했는데 하며 뒤늦게 후회한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그때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기에 지금에서야 후회한다. 제대로 예측하고 착실히 준비했다면 지금 후회할 일이 없다. 그때 제대로 보지 못했고,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일 어떻게 될지 안다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준비를 하면 된다. 그러나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면, 여전히 통찰력이 모자라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과거의 실패를 찬찬히 뜯어보며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통찰력이 생길 것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이 10년 뒤 성공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또다시 세월이 흐르면 분명 2023년 오늘을 되돌아볼 것이다. 그러면서 똑같이 되뇔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2023년 1월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이다. 늘 회환에 젖고 안타까워하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황혼녘이 된다.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다 사라지고 나서 땅을 쳐도 소용이 없다. 지금이라도 잘 준비하면 무얼 하기에 늦은 때란 없다.
오늘도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안갯속이다. 빨리 안갯속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제대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 머릿속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금 졸고 있다. 황혼이 오기 전에 그를 깨워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남들 보기 민망하지 않은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건 그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보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