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길, 머리에서 가슴까지

by Henry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Ushuaia)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마을은 우리 국토의 마지막 지점이다. 우리는 이곳을 땅끝 마을이라 부른다. 육지로서는 마지막에 있는 마을이고, 이곳을 지나면 곧장 바다를 만난다. 끝 혹은 마지막이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과 우수를 담고 있다. 이곳 주민이 보면 해남 마을은 한반도 여행의 시작점이 된다. 육지의 끝이 되었든 아니면 시작이 되었든 해남은 그런 상징성을 갖기에 사람들이 찾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최남단에 있는 우수아이아(Ushuaia)라는 도시가 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이곳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해협에 있다. 북으로는 만년설, 남으로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남극과 가까워서 바닷물은 서늘하고,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젖었다. 인구 5만 명이 사는 이곳에 가면 때 묻지 않은 자연과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지구의 마지막 지점이다.


우수아이아는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도시다. 서울과 그곳까지의 거리는 약 17,766km라고 한다.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대략 그 정도 거리라고 보면 된다. 비행시간만 해도 최소 20시간에서 40시간까지 걸리는 먼 길이다. 그러니 그곳까지 가려면 최소 이틀 이상은 잡아야 한다. 하루 20~25km의 속도로 걸어서 그곳까지 가려면 2~3년은 족히 걸린다.


이 정도면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여행길도 있다. 물론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머리에서 출발한 사랑이 가슴에 도착하기에는 평생이 걸린다. 그것도 운이 좋은 사람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은 끝내 가슴에 도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먼 걸고도 긴 여행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입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 속에서 모든 사람이 곤궁하고 고난에 처했을 때마다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여행이 무려 70년이나 걸렸습니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추기경님의 생애가 곧 사랑이다. 그런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라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진다.


2009년 선종하시는 순간까지 추기경님께서는 오직 사랑을 실천하셨다. 그는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변화시킨 참된 지도자였다. 일평생 가난한 이들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연민에 아파하셨다. 참된 사랑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천하신 당신께서 머릿속 사랑을 가슴으로 실천하기까지 그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그분을 생각하면 나는 늘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걸리는 얼마일까. 여기서 말하는 가슴은 심장을 뜻한다. 뇌과학으로 본다면 가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가슴이다. 그렇지만 비유를 위해서 그것은 무시하자. 따따부따 따지고 나면 김수환 추기경님이 하신 말씀의 본질이 흐려진다. 전하시는 말씀의 뜻만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우리 두뇌의 앞부분인 전두엽은 사유와 추론을 담당한다. 그곳에 지식이 머무르고 사랑이 싹튼다. 이곳과 심장까지의 거리는 불과 20~25cm 남짓하다. 추기경님께서 이 짧은 거리를 여행하는 데 무려 70년이나 걸리셨다. 굳이 따져보자면 하루에 겨우 0.001cm씩 이동한다. 참으로 멀고 더딘 여행이다. 그것도 추기경님이시니 그곳에 도착하셨지, 나 같은 사람은 그저 꿈으로만 남았다.


사랑을 아는 것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머릿속에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사랑을 실천하려면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린다. 그나마 그곳에 도달하는 사람은 형편이 나은 편이다. 많은 사람이 영영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단어나 지식이 가득한 사람은 지식인이다. 뭘 물어도 척척 대답하고 막힘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말하기 힘들다. 그나마 지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제 걸로 만든 사람을 지성인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바를 실천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아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대의 사랑은 가슴에 도착했는가?
입으로 읊조리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저 사랑 타령에 불과하다. 그것을 실천해서 참사랑으로 만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랑으로 충만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70년이란 세월을 보내셨다고 한다. 긴 세월이지만 일반인은 감히 평생을 두고도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평생을 걸어도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긴 여행길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뜻의 사랑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이웃에 대한, 심지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주기만 하는 그런 사랑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그렇듯이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도 아름답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그들이 죽음으로써 불멸의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애증의 불꽃이자 열정의 완성이다. 안타깝지만 영원할 것 같은 남녀의 사랑은 활짝 피었다가 세월 앞에 빛이 바래고 시든다. 잠시 머문 그들의 사랑이 떠나고 나면 가슴에는 애증의 잔해만 남는다. 그것은 남녀의 사랑이 갖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대의 사랑은 가슴에 도착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내 사랑은 여전히 머릿속에서 맴돈다. 언제쯤이면 가슴으로 도달해 지혜로운 사람이 될까.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의 욕망에 젖지 않을 수 있을까. 벌써 지치고 기진한 내 사랑이 도달하기엔 참 어렵고도 먼 여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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