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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Feb 15. 2023

성(城)안의 부르주아, 별난 침팬지

성안의 부르주아가 된 별난 침팬지

'마니피캇의 성모'(산드로 보티첼리, 1480~1481년), 이탈리아의 대부호인 메디치 가문의 가족들을 그려 넣음 - 사진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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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생산 기반은 농업이었다. 농사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땅을 두 군데로 나눠 하나만 농사지었다. 나머지 하나는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 경작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땅에서 나오는 수확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영주나 귀족들은 농민들의 수확을 대부분 가져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농민은 소작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것에 없어 늘 가난하고 굶주렸다.


중세 후반기가 되면 땅을 삼등분해 3년을 주기로 순서대로 바꾸어 경작하는 삼포제 농법이 개발되었다. 삼포제 농업 기술은 농작물의 수확량을 크게 증대시켰다. 농업 생산물이 비약적으로 증대하자 유럽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술 혁신과 생산력의 향상은 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했다. 중세의 장원경제도 서서히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세 전반기를 지나자 해상에서 바이킹의 출몰도 뜸해졌다. 지중해의 뱃길에 평화가 찾아오자 상인들은 안심하고 뱃길을 이용했다. 이때부터 유럽 내부에서 양털을 짠 모직물이 크게 유행하자 모직물 산업이 번창했다. 지중해의 항구 도시에는 동양의 진귀한 물건과 유럽의 모직물이 몰려들었다. 특히 이탈리아 도시들은 십자군 전쟁의 이동 경로로 큰돈을 벌다가 전행 후에는 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사람들은 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쉬운 성채 가까이 모여들어 집을 지었다. 이곳에 시장을 개설함으로써 도시가 형성되었다. 집과 시장이 모인 도시 외곽에 성벽을 쌓아 도시를 보호했다. 곡물 생산이 증가하고 경제가 좋아지자 도시의 시장도 다시 북적거렸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도시는 나날이 커졌다. 부자들은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며 장사에 전념했다.


프랑스어로 ‘성(城)’을 뜻하는 단어로 bourg가 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유한 상인은 성(bourg)안에 모여 살았다. 이들은 성안에서 안전하고 윤택한 성내 생활을 즐겼다. 사람들은 그들을 성(bourg)안에 사는 부자라는 뜻으로 '부르주아'(프랑스어: bourgeoisie, 부르주아지)라고 불렀다. 그들은 수중에 많은 현금을 보유했고, 귀족보다 현금 동원 능력이 훨씬 뛰어난 신흥 부자계급이었다.  


귀족은 동양에서 들어오는 비단, 향신료, 후추를 구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동양의 진귀한 물품을 많이 갖는 것이 귀족의 품위를 결정했다. 자연히 귀족 사이에는 이것들을 둘러싼 경쟁이 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럽의 귀족은 현금에 목말랐다. 게다가 유럽의 모직물을 구입하는 데도 돈이 필요했다. 현금이 없거나 당장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귀족은 애가 탔다.


돈을 주고 신분의 자유를 산 별난 침팬지

사진 출처 https://m.blog.naver.com/pine1218/220404328966?view=img_1


당시 귀족의 수입은 농민이 납부하는 농작물이 대부분이다. 그걸 가지고는 원하는 상품을 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십자군 전쟁 자금을 대느라 빛도 많이 진 상황이었다. 파산지경에 이른 귀족들은 생각보다 궁핍했다. 어떻게 하면 현금을 확보할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번쩍하고 뇌리를 스치는 방법이 떠올렸다.


"그래!! 부르주아한테 신분의 자유를 팔자!! 돈을 왕창 받고 한몫 챙기자!!"


당시만 해도 성안의 부자들은 신분적으로 영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부르주아들도 영주의 통제 아래 있어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다. 부자들도 신분상 지위가 농민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부르주아들은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갑갑했다. 이런 차에 귀족이 돈을 주면 자유를 주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부유한 상인들은 현금을 듬뿍 챙겨주고 신분의 자유를 샀다.


부르주아가 완전한 자유 시민권을 얻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영주들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부자들을 시기하고 적대시했다. 왕이나 교회도 신흥 세력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위협을 느낀 부자들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호위병을 고용했다. 또 상인들끼리 단합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한 부자들은 주민 자치 기구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귀족과 세 대결을 시작했다.  


중세도 후반에 접어들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가톨릭 교황 사이에 충돌이 잦았다. 세속의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이 유럽의 부유한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쳤다. 이런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틈타 부르주아는 귀족들에 반란을 일으켰다. 싸움이 격해지자, 양측은 권력을 나누는 과두체제를 받아들였다. 치열한 투쟁을 거치면서 도시의 부르주아들은 완전한 신분의 자유를 획득했다.


시장경제와 사적 소유권을 확보한 별난 침팬지

중세 말기가 되면서 완전한 신분의 자유를 획득한 별난 침팬지가 늘어났다. 현금을 받고 신분을 팔아버린 귀족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다. 역사의 주도권은 이들 부르주아 자유 시민 계급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도 장원경제는 상업을 통해 돈을 버는 상업자본주의에 경제적 패권을 넘겼다. 자유 시민인 부르주아는 자유롭게 시장을 개설하고, 이익을 개인이 소유하는 시장경제를 발전시켰다.


경제구조가 바뀌면 사회구조도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왕과 귀족 중심의 신분사회는 부르주아 중심의 자유 시민사회로 전환했다. 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고, 그것을 이용해 자유 시민이 된 부르주아는 떨리는 손으로 자본주의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별난 침팬지는 드디어 자본주의라는 신세계로 첫발을 내디뎠다. 15~18세기에 걸쳐 상업이 경제의 기반이 된 상업자본주의가 대세를 이뤘다.


상업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신분제를 완전히 해체하고, 자유 시민계급과 시장경제 중심으로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천 년을 버틴 중세를 무너뜨린 것은 총도, 칼도 아니다. 먹고살려는  별난 침팬지의 집념인 경제가 그 일을 해냈다. 상업자본은 역사의 포신에 실탄을 차곡차곡 쟁여 18세기 말 산업혁명을 폭발시킬 준비를 서둘렀다.


별난 침팬지는 신분제의 고리를 풀고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약 600만 년 전후 별난 침팬지가 부모 형제를 뒤로하고 나무에서 내려오는 결단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별난 침팬지는 자기 뜻대로 시장에서 장사하고, 번 돈을 자기가 소유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장경제와 사적 소유권이라는 두 개의 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시장경제를 향한 별난 침팬지의 긴 여정이 일차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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