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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Feb 06. 2023

별난 침팬지가 세운 제국의 몰락

https://www.fmkorea.com/3752404964


정복 전쟁은 끝나고

별난 침팬지가 세운 제국은 노예와 노예에 가까운 소작인들이 지탱했다. 지배 계급은 그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했다. 농민과 노예의 생산을 지배하고 잉여생산물을 착취하였다. 소작인은 주로 농사를 짓지만, 노예는 농사를 지으며 귀족의 가사를 담당했다. 노예가 없으면 고대 국가는 뿌리째 흔들리고, 국가를 유지할 수조차 없다. 그만큼 노예의 안정적인 공급은 고대 국가의 사활을 건 중요한 문제였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 도구로만 인정되었기에 결혼할 수 없다. 출산을 통해 노예가 증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예가 죽으면 노동력이 줄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노예를 조달해야 한다. 국가 내부에서 경제적으로 몰락한 사람이 노예가 되기도 했지만,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노예의 중요한 공급처는 정복 전쟁이다. 타민족을 침략해서 그들의 백성을 노예로 잡아왔다.   


고대 제국의 전성기가 지나면서 이민족과의 정복 전쟁이 줄어든다. 당시의 군사력과 기술로는 더는 정복할 땅이 남지 않았다. 사회가 안정되자 귀족의 사치와 향락은 극에 달했다. 제국의 귀족은 전쟁을 기피하고 놀고 즐기는 것에 몰입했다. 제국은 쇠약해졌고, 노예 공급은 줄어들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4세기를 지나면서 고대 로마는 더 이상 정복할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설혹 땅이 남았다 해도 전쟁을 일으킬 만한 군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마 귀족은 권력에 취해 흥청망청한 생활에 빠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노예 공급은 중단되었고, 노동력이 급감했다. 농장을 가진 귀족들은 일손이 부족한 절박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당시 로마 귀족들이 소유한 라티푼디움(latifundium)은 엄청난 크기의 농장이다. 이 땅을 경작하고 수확하기 위해 최소한 수천 명의 노예가 필요하였다. 로마의 귀족은 노예를 구할 수 없게 난감해졌다. 그렇다고 귀족 체면에 직접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신분의 족쇄를 풀어주고, 땅을 쪼개 노예한테 분양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역시 먹고사는 문제가 사회체제를 뒤흔들었다. 노예가 사라지자 이들의 노동에 기대 살던 로마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로마의 몰락은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붕괴하는 것을 뜻한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통치했던 제국의 붕괴로 식민지는 갈가리 찢어졌다.


제국 경제를 뒤흔든 노예 공급 중단

제국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데 로마 내부는 권력 쟁탈이 치열했다. 이 와중에 북쪽의 게르만족은 시도 때도 없이 로마를 침략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재위 306-337)는 지긋지긋한 게르만의 침입을 피하고, 로마 내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그는 330년 로마의 수도를 지금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수도 이전은 가뜩이나 뒤숭숭한 로마에 회생 불가라는 치명타를 날린 셈이다


당시 강력한 종교적 힘을 갖기 시작한 교황은 그대로 로마에 머물렀다. 로마 교황과 로마 황제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과거 수도인 로마와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사이에도 잦은 갈등과 반복이 일었다. 로마 제국의 영토를 둘러싼 정치와 종교의 싸움이 본격화된 것이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자 정치적인 힘의 공백이 생겼다. 그 틈을 타서 영적 세계를 통치하는 교황이 유럽 내부를 통제하는 권력을 획득했다.


골치가 아파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재위 379-395) 황제는 넓은 땅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자신의 두 아들에게 맡겼다. 이때가 395년으로 드디어 비잔티움의 동로마와 서로마가 분리됐다.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보다 경제력이 약했고, 내분 때문에 군사력도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노예 공급의 중단으로 경제적 기반마저 흔들리는 서로마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서로마 제국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세력이 약해졌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을 호령하던 서로마 제국은 허망하게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로마 제국 말기에는 귀족의 향락과 사치, 내부 분열과 군사력의 약화를 틈탄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다.


이에 반해, 동로마 제국은 무려 1,000년을 버텨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중세 중기까지 유럽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였다. 또 동유럽 세계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전파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세 천 년은 서로마가 멸망하고 동로마가 멸망하기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로마는 이렇게 화려한 영광의 시대를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별난 침팬지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귀족들은 노예에게 신분적 자유를 주고 토지를 임대하도록 했다. 노예들은 결혼할 수 있고, 귀족의 토지를 경작해서 수확량 일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됐다. 귀족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었던 노예는 토지를 매개로 경제적 예속관계로 신분이 바뀌었다.


강력한 로마의 군사력이 사라지자 서유럽 내부는 힘의 진공상태가 되었다. 로마와 프랑스 등 왕국은 수많은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 땅을 차지한 수많은 영주가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성립했다. 서유럽 내부의 영토마다 영주가 사는 성을 중심으로 경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소작인인 농노와 그들을 보호하는 기사, 그리고 최상위 권력자인 영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자급자족의 경제체제가 생겨났다.


농민은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수확물을 납부했다. 영주가 전쟁을 치르면 전쟁터에 참여하는 군역의 의무를 진다. 또 성주나 지주의 자녀 결혼식 등에 노력 동원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다. 중세의 농민은 지주와 성주를 위해 노동이나 군역의 의무를 지고, 대신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생활을 보장받았다.


세상이 바뀌어도 변난 침팬지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착취자가 고대 국가의 귀족에서 중세의 영주로 바뀐 것뿐이다. 별난 침팬지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팍팍하다. 노예제는 폐지로 노예도 신분의 자유를 얻었지만, 땅을 매개로 한 경제적 속박은 끊어지지 않았다. 국가가 바뀌고 권력이 바뀌고 심지어 경제체제가 바뀌어도 별난 침팬지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 뼘의 땅도 갖지 못한 별난 침팬지는 역사 속에서 늘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삶의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은 경제적 독립밖에 없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지금은 그때보다 기화가 많고 경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높다. 그렇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고 허덕인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자본주의 체제도 그 문제까지는 해결하지 못한다. 경제적 자유를 갖지 못한 사람은 자유로부터 도피해 다시 예속의 길을 걷는다. 슬프고도 아프지만, 현실이라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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