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커서 뭐가 될까?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니?"
"너처럼 공부 안 하고 놀면 나중에 거지가 될 거야!!"
엄마가 화가 많이 났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런 막말을 뱉을까 안타깝다. 이 말을 듣는 아이는 무척 당황스럽다. 그러면서 '내가 커서 뭐가 될지 어떻게 알아?'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입을 삐죽 내민 아이는 화가 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가면서 애꿎게 부서져라 하고 방문을 세게 닫는다.
엄마는 아이의 장래를 걱정해서 이런 말을 한다. 정작 아이는 엄마는 왜 말을 꼭 그렇게 하는지 화가 난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뚱하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기대와 현실의 엇갈린다. 이 차이가 서로를 불만투성이로 만든다. 서로 사랑하는 엄마와 자식 간이지만 소통이 잘못되는 바람에 영 불편하다.
아이가 기대대로 잘 자라준다면 부모가 걱정할 일이 없다. 부모가 바라는 바와 아이의 행동이 서로 엇박자를 일으키면 부모는 화가 난다. 아이가 조금만 내 말을 들어주면 좋을 텐데, 왜 그리하지 않을까. 세상을 살아 본 내가 하는 충고를 귀담아들으면 인생이 펼 텐데 왜 그걸 안 할까. 이런 생각으로 부모의 머리가 복잡하고 속도 상한다.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는 어느새 커지고 짜증이 묻어난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궁금하다. 부모가 기대하는 건 뭘까? 아무래도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다. 요즘은 직장보다 직업이 더 중요한 시대이니 자녀가 의사가 되든가 아니면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덜 고생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바라는 바가 이와 비슷할 것이다.
아이가 자라서 뭐가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가 대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기까지 최소 15년이나 20년이 걸린다. 그러니 아이한테 뭐가 될 것인지 다그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이가 자라서 뭐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바라는 의사가 될지, 판검사가 될지, 회사원이 될지, 아니면 사업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아이가 일찍 글을 깨치고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그것이 쭉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금 아이의 머리가 좋다고 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머리를 유지한다는 보장도 없다. 아이가 자라 대학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위기의 순간에 부딪힌다.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향해 매진하는 아이는 자라서 뭐라도 될 것이다.
용한 역술인을 만나봐도 소용없다.
커서 뭐가 될지는 어떻게 관리하고 노력하느냐에 달렸다. 어릴 때 천재라고 칭송받던 아이가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는 경우가 흔하다. 그 많은 머리 좋고 똑똑하다는 아이들이 20년 후 혹은 30년 후에는 사라지고 없다. 영리하고 머리 좋은 아이들이 다 어디로 사라지는가? 분명 성인이 된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들의 존재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들이 머리 좋고 똑똑하다는 사실이 너무 부풀러 졌을 수도 있다. 그 시절에는 조금만 잘하면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측정이 잘못되어 순간적으로 머리가 똑똑해 보였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고 실제로 머리는 좋았는데, 그 후 제대로 관리를 안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똑똑하다는 것만 믿고 공부를 안 하고 팽팽 논다면 머리는 도로 나빠진다. 우리 뇌가 가진 독특한 성질인 뇌 가소성(可塑性)은 자라면서 얼마든지 머리를 변하게 해 준다.
아이가 커서 뭐가 될지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가 자라 어느 대학에 갈지 또 그 후에는 뭘 하며 먹고살지 누가 알겠는가. 애타는 부모는 앞날을 잘 맞춘다는 용한 역술인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채 바로 원하는 답을 주는 점쟁이는 용하다고 입소문이 난다. 오늘도 그 집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드나든다. 아이의 삶을 제대로 풀어내는 역술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듣고 싶을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아이는 자라서 무엇이든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몇 번의 뭔가 될 기회가 온다. 그 기회를 잘 살리는 아이는 커서 뭔가 된다.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도 이름을 날리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그래도 부모 마음은 늘 초조하고 안타깝다. 아이가 좋은 대학을 나와 근사한 직업을 갖길 학수고대한다.
우리는 어릴 적 천재라고 칭송받던 아이가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초등학교 시절 머리 좋고 똑똑하던 그 많은 아이가 20년 후 혹은 30년 후에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몰라 볼 뿐이다. 그 시절에는 분명 천재였는데 자라면서 천재성이 사라진 아이는 어쩌면 관리에 실패했을 것이다.
반대로 존재조차 희미한 아이가 자라,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경우도 많다. 공부도 신통치 않고 특출한 재주도 없던 아이가 훌륭한 인물이 되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아니 그 찌질이가"'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러기도 한다. 그런 일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넘친다. 우리는 이런 아이를 우리는 '늦게 피는 아름다운 꽃'이라 부른다.
아이가 일찍 글을 깨치고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끝까지 그리된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아이의 머리가 좋다고 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좋은 머리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위기를 극복하면서 자기 목표를 향해 꾸준히 매진하는 아이는 뭐라도 될 것이다.
격려해도 모자랄 판에 낙인은 찍지 말아야 한다.
어릴 적 평범한 아이가 뛰어난 인물이 되는 걸 보면, 커서 뭐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의 현재가 어떻든 그것을 너무 민감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아이의 어깨들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우는 일이 급선무다.
사람은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사람은 칭찬받을 때보다 비난받을 때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부정 편향성'이라고 불리는 이 말은 백 번을 칭찬해도 한 번의 비난으로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한다는 뜻이다. 아이의 머릿속 신경망 회로의 밀집도는 어른보다 몇 배나 높다. 부정적인 말이나 비난을 어른보다 훨씬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더구나 아이의 두뇌 시냅스는 부모나 선생님의 비난을 곧이곧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너 이렇게 공부 안 하면, 커서 거지가 될 거야!!!'라고 하는 엄마의 이 말은 아이의 머릿속에 비수처럼 꽂힌다. 이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아이의 뇌 신경망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아 나는 바보구나!! 나는 머리가 나쁘구나!!'하고 뇌 신경망은 자조하며 노력을 아예 포기한다. '부정 편향성'과 '낙인효과'가 작용해 아이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재미와 유혹이 넘치는 오락과 게임에 빠져든다.
"엄마는 내가 머리가 나빠서 안 된다고 말했어!! 그것도 많이.... "
과연 어느 엄마가 진심으로 이 말을 했을까. 그저 아이가 잘되라고 자극을 주려 한 말이다. 그런데 아이는 이걸 진실로 받아들인다. 아니 아이의 머릿속 신경망이 그렇게 이해하고 반응한다. 부모가 무심코 던지는 말이 아이의 머릿속을 얼마나 헝클어 놓는지 짐작조차 못한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아이의 여린 마음을 헤집고 난도질한다. 부모가 아이를 격려하지 못할망정 낙인을 찍어서야 하겠는가.
아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격려하고 지원하자. 사람은 텃밭의 채소를 키우는 데도 정성과 인내를 다 한다. 채소가 잘 자라지 않는다고 조바심 내는 농부는 없다. 묵묵히 잘 자라게 물과 거름을 듬뿍 준다. 영양분을 뺏겨 스트레스받을까 봐 부지런히 잡초를 없애준다. 그런데 왜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는 인내와 배려를 보여주지 않는 걸까. 격려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아이의 머릿속에 흉측한 낙인을 찍는 걸까? 진짜 그 이유가 궁금하고, 그것이 알고 싶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뭐가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단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톰 행크스, Thomas Jeffrey Hanks)의 엄마(샐리 필드, Sally Margaret Field)가 검프에게 들려준 말이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소개는 따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 운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자폐인 아들에게 들려준 엄마의 말이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아 안에 뭐가 들었는지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커서 뭐가 될 거냐고 아이를 닦달하지 말자. 대신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함께 노력해 보자고 말하면 어떨까.